『발가락 낙관, 김영숙, 글상걸상, 2019
『발가락 낙관, 김영숙, 글상걸상, 2019

지난 수요일에 한림에 있는 황우럭만화카페에 갔다. 그곳에서는 한림에 사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화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구술 채록이 최근 꽤 활발히 이루어지는 편인데, 그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야기를 전하는 어르신 중에서 고창훈 농부는 1939년 한림2리에서 태어났다. 제주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배운 농업 기술을 실제 농사에 적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참외 농사를 지을 때는 참외가 덩굴에 가득 열려 발 딛을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스타 강사였다. 농업 관련 강연으로 한때 이름을 날렸다. 그가 강사를 하게 된 것은 그만의 농사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새로운 농사법은 아니었다.

그는 식물과의 대화를 강조했다. 작물의 입장에서 무엇을 좋아할지를 고민하라는 것. 농사는 자연과의 대화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 필요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다며. 귤나무 전정할 때도 바람 부는 방향과 햇빛이 드는 각도 등을 살피면서 전정해야 한단다.

자연을 상대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면서 자연에게 묻고 답을 구해야 한단다. ‘이 나무가 왜 그럴까?’, ‘나무는 왜 푸를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단다. 자연에게 귀기울이면 자연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김영숙 시집 『발가락 낙관』은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책이다. 시인은 시 농사를 짓고, 출판사는 책 농사를 짓는다. 제본과 표지 제작을 손으로 다 한다. 농사를 손으로 다하는 것처럼.

김영숙 시인은 귤농사를 짓는 시인이다. 김영숙 시인네 귤이 맛있다는 건 서울까지 소문이 나서 겨울에는 주문이 쇄도한다. 나도 몇 번 육지로 귤을 보낼 때 이용했는데, 받은 사람들이 모두 맛있다는 답장이 와서 흐뭇했다.

농사는 삶과 같아서 고된 일이다. 김영숙 시인의 남편은 한국전력에서 일했다. 지난한 삶이 시 「발가락 낙관」에 들어있다. “이 깊은 동굴에 와 낙관을 찍었을까/ 이 깊은 동굴에 와 낙관을 찍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로 혼자 눈물 삼켰을까” 이제는 퇴직해 농사를 지으며 발가락 낙관을 찍는다.

삶이 곧 농사이자 농사가 곧 삶이기에 이 시집에는 이런 시도 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슈퍼 문을 밀고 와/ 다다다 다다다다 하루 일 늘어놓는/ 새터민 리씨 목소리 출입문을 넘는 저녁// …… // 살 것 딱히 없어도 오며 가며 들르라고/ 슈퍼우먼 따로 챙긴 반찬통이 묵직해/ 함경도 강아지풀이 잔뿌리 또 내렸다”(「잔뿌리 내리는 법」)

고창훈 농부는 공생농법을 강조했다. 이 시에서도 공생이 들어 있다. 소득을 많이 얻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나 혼자만 잘 살 수는 없다. 함께 잘 살아야 한다. 새터민이 잔뿌리를 잘 내릴 수 있게 돕는 사람이 슈퍼맨이고 슈퍼우먼이다.

한림에 갔더니 금능에서 온 L 시인이 수박을 갖고 왔다. 집에 와서 수박을 먹는데 저녁바람처럼 맑고 시원한 맛이 났다. 칼로 수박을 가르니 식구들이 탄성을 지른다. L 시인은 수박을 아내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올해 처음으로 수박 농사를 지어봤는데, 나보다 네가 먼저 먹는 거야.” 이렇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은 언제나 풍년이다.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김신숙 시인과 현택훈 시인이 매주 번갈아가며 제주 작가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는 코너다. 김신숙·현택훈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부부는 현재 시집 전문 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제주 작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다양한 기획도 부지런히 추진한다. 김신숙 시인은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동시집 『열두 살 해녀』를 썼다. 현택훈 시인은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를 썼다. 시인부부가 만나고, 읽고, 지지고, 볶는 제주 작가와 제주 문학.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