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범섬』(허경심, 책만드는집, 2021)
 『구월의 범섬』(허경심, 책만드는집, 2021)

태풍이 오면 각 언론사의 차량이 모이는 곳이 있다. 바로 법환포구이다. 태풍이 오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다. 다른 해안도 많은데 유독 그곳에 모이는 까닭을 알아보니 의외로 간단하다. 그곳이 그림이 가장 잘 나와서 그렇다고 한다. 그만큼 법환 바다는 파도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범섬에는 목호의 난이라는 역사가 전해온다. 최영 장군은 목호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제주도에 상륙했다. 목호는 최후의 항전지로 범섬을 선택했다. 아무리 대군도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니 전원 공격이 어려웠다. 전략가 최영은 제주도 어선들에게 총집결 명령을 내렸고, 이른바 띠배를 만들어 신속하게 범섬으로 들어가 목호들을 소탕했다. 현재 법환동 신당 옆에 최영장군승전비 비석이 커다랗게 세워진 것을 보면 여러 생각이 겹친다. 그리고 범섬이 보이는 풍경에 강정 해군기지가 있으니 묘한 일이다.  

법화포구를 끼고 있는 법환동에서 한라산 쪽으로 올라오면 서호동과 호근동이 있다.

호근동에서 2년 동안 서점을 한 적 있다. 호근동은 시집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태광문화사, 1984)을 쓴 김광협 시인의 고향이다. 그의 시 「수선화」 시비가 있는 마을회관에서 서점까지 걸어오다보면 그의 시 「유자꽃 피는 마을」처럼 유자나무가 있는 집들을 꽤 볼 수 있다.

그 옆 마을 서호동은 허경심 시인의 고향이다. “아이가 바다 향해 “할아버지!” 부를 때면// 초저녁 수평선에 꽃씨처럼 피어나던// 서귀포“(「고향 별」), ”노을빛/ 구월 바다/ 떠난 이의 뒷모습 같다“(「구월의 범섬」)”, “등 굽은 팔십사 년 남루했던 돛폭에도/ 초가을 미풍 끝에 입질하던 갈치처럼/ 은회색 지느러미가 살아 꿈틀거린다”(「할아버지 바다」) 등의 시를 보면 고향에 대한 그의 마음이 아릿하게 전해온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업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자란 것으로 보인다. 어촌 풍경에서 자란 “아홉 살 소녀”는 어느덧 제주시자원봉사종합센터에서 일을 한다. 청소년 인문학 캠프 관련으로 인연이 되어 허경심 시인을 몇 번 봤다. 처음에는 시를 쓰는 줄 몰랐다. 딱딱한 공무원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부드럽게 대하는 모습이 잔잔한 파도처럼 다가왔다. 알고 보니 젊은시조문학회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이 시집에서 해설을 쓴 고정국 시인은 마치 손녀의 첫 시집을 대하듯 살갑게 글을 썼다. 고정국 시인은 젊은시조문학회에서 오랫동안 시 수업을 한 것으로 안다.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한 허경심 시인을 아끼는 마음이 해설에서 구구절절 담겨있다.

제주도 시인은 첫 시집을 내면 바다가 하나 생기는 것 같다. 허경심 시인은 범섬이 보이는 바다를 갖게 된 셈이다. 서귀포중앙도서관에서 이중섭거리에서 시화전을 한다며 시를 추천해 달라고 하기에 서귀포가 고향인 허경심 시인이 떠올랐다. 그는 시 「소라게」를 보내왔다.

“그래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나/ 내 엄지발가락이 검지보다 짧아서/ 유년의 파도 소리는 안으로만 숨었지// 혼자서 노는 하루 수평선이 참 길었지/ 썰물 녘 조약돌을 잡았다 놓았다가/ 엄지와 검지 사이로 어루만지던 시간// 갯무꽃 흐르러진 서귀포 범섬 바다/ 둥글게 등 굴리고 물속을 드나들던”(「소라게」)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찬 풍경이 있다. 올해 9월부터 하반기 동안 서귀포 이중섭거리에 가면 이 시를 볼 수 있다.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김신숙 시인과 현택훈 시인이 매주 번갈아가며 제주 작가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는 코너다. 김신숙·현택훈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부부는 현재 시집 전문 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제주 작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다양한 기획도 부지런히 추진한다. 김신숙 시인은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동시집 『열두 살 해녀』를 썼다. 현택훈 시인은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를 썼다. 시인부부가 만나고, 읽고, 지지고, 볶는 제주 작가와 제주 문학.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매주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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