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구비 사투리 옛이야기』노제운, 해와나무, 2019
『구비구비 사투리 옛이야기』노제운, 해와나무, 2019

아내가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귀신이 무서울까, 글자가 무서울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귀신이 무섭다고 말했다.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내 생각이 깊지 못했다.글자들이 귀신보다 더 오래 살아 남았으니 글자가 더 무서운 거라고. 글자야말로 정말 무서운 존재인 것.(나는 역시나 아직 멀었다.)

동산 위에 있는 세 그루의 소나무가 무서웠다. 늙은 소나무 세 그루는 한낮에도 검게 보였다. 누군가의 그림자 같았다.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것도 같았다. 나는 짐짓 고개를 돌리고 걸을 때도 있었다. 으스스한 풍경에는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이야기였다.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중학생 때 겁쟁이였다.(지금도 여전히 겁 많은 아저씨이지만.) 그 세 그루의 소나무가 보이는 구간을 지날 때는 차라리 눈 감고 달렸다. 그때 나는 또 많이 부딪치는 중학생이었다. 어딘가에 정신 팔렸다가 꽝 부딪치곤 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자연에 더 무서움을 타던 나였다. 천둥소리는 하늘의 꾸중 같지 않은가. 토테미즘을 신앙으로 삼았던 아주 오래된 옛날 사람들처럼 나는 벼락 치는 날에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우리는 죽어서 이야기가 된다.

나는 이야기를 무서워했지만 결국 그 이야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셈이다.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랫말이 만드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슬픈 노래를 들으며 곧잘 울곤 하니 말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비슷하게 생각하면 언젠가 세상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도 옛날이야기. 모두 ‘전설의 고향’의 글감이다.

허수경은 시 「땡볕」에서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라고 노래했다. 언어에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주 사투리는 무엇과 같을까. 언어 자체가 이야기다.

조준호의 동화 『호랑이를 탄 가야금』(시공주니어, 2020)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전제 없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제약이 없다. 그것은 천명관의 소설 『고래』(문학동네, 2004)에서 극명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사공의 노래 ‘후회를 하네, 다짐을 하네’를 듣는데 송창식의 노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노래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비구비 사투리 옛이야기』(해와나무, 2019)는 팔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주도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이곳은 이야기의 섬이지 않은가. 각 지역의 설화를 사투리를 사용해 전하는 게 인상적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책 『눈사람의 재채기』(보림, 2002)는 눈이 오는 까닭을 상상하여 만든 이야기다. 연상(聯想)이 상상을 조장한다. 물론 그러한 과정은 즐거운 일이다.

마을지를 펼쳤을 때 앞에는 볼 필요 없고, 뒷부분에 수록된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읽는 게 재미있다. 마치 ‘삼국유사’의 기이편처럼. ‘삼국사기’ 같은 마을지를 만나면 양장으로 제본한 책이 참 무거워 팔이 아프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속담에는 이야기의 힘과 풍요가 들어 있다. 이야기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끝없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면 이 길의 언덕에 세 그루 소나무가 무서운 것도 즐겁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끝까지 봤던 ‘전설의 고향’처럼 말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자가격리 중인 아내가 내게 하룻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라고 독려한다. 나는 쭈뼛거리다 입을 뗀다. "네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현택훈, 김신숙 '시인부부'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김신숙 시인과 현택훈 시인이 매주 번갈아가며 제주 작가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는 코너다. 김신숙·현택훈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부부는 현재 시집 전문 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제주 작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다양한 기획도 부지런히 추진한다. 김신숙 시인은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동시집 『열두 살 해녀』를 썼다. 현택훈 시인은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를 썼다. 시인부부가 만나고, 읽고, 지지고, 볶는 제주 작가와 제주 문학. '시인부부의 제주탐독'은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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