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서 3·10총파업의 의미와 계승 과제 토론회(사진=김재훈 기자)
4·3에서 3·10총파업의 의미와 계승 과제 토론회(사진=김재훈 기자)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됐다지만 미군정 치하의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했다. 그래서 제주도민 95% 한마음으로 뭉쳤다. 이들은 평화적이고, 현대적으로 미군정과 경찰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을 찾았다. 바로 파업이다. 육체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공무원들까지 동참했다. ‘노동자’로서 함께 한목소리를 냈다. 1947년 3월 10일의 일이다. ‘3·10총파업’이라 부른다.

총파업 9일 전에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이 모는 말에 한 어린아이가 치였다. 경찰은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정과 경찰 권력이 시민을 대하는 태도는 일제와 크게 달라진 바 없었다. 일제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 순사는 경력을 인정받아 직을 유지해 나갔다.

3·1절 기념대회에 모인 도민을 향한 경찰의 발포는 해방 후 일그러져가는 한국 현대사를 함축했다. 제주도민들은, 그 모습을 가장 먼저 응시했다. 경찰이 모는 말에 한 아이가 치이면서. 그것에 항의하면서. 동족 경찰이 쏜 총탄에 죽어가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3·10총파업의 계기다.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단순한 시위 통제 목적이 아닌 당시 미 군정장관이 이동하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강요배作)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단순한 시위 통제 목적이 아닌 당시 미 군정장관이 이동하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강요배作)

지난 30일, 3·10총파업의 의미를 살피는 토론회가 열렸다. <4·3에서 3·10총파업의 의미와 계승 과제>가 주제다. 무장봉기와 국가의 양민학살 구도를 넘어 제주4·3의 전사前史를 들여다보고 4·3의 의미를 재구성해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4·3의 과제 중 하나인 정명으로 연결된다. 현재 제주4·3의 정명은 사실상 답보상태다. 어떻게 시작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3·10총파업 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인 1948년 4월3일, 왜 도민들이 “탄압이면 항쟁”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무장봉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총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그래야 법률적으로 ‘제주4·3사건’으로 축소돼 불리고 있는 이 역사의 제대로 된 이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의 좌장을 맡은 박성인 제주투데이 이사는 “4·3에 대해서 진상규명이 이뤄졌고, 많은 진전이 이뤄지고 있지만 3·10총파업은 간단하게 언급될 뿐”이라며 노동자인 제주도민들이 주체적으로 사회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해 들고 일어선 3·10총파업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거론했다. 박성인 이사에 따르면 3·10총파업은 한국의 민주화에 노동자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지점이다.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위원장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위원장

이날 첫 번째 주제발표를 맡은 송시우 위원장은 3·10총파업을 ‘제2의 독립운동’로 바라봤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했지만 미군정은 자국의 편의와 이익에 따라 한국을 통치했다.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반도는 미소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해방했다지만 한반도는 온전한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송시우 이사장이 설명한 해방 이후 1947년 3·1절 기념대회 이전까지 정세는 다음과 같다. 

<해방 이후 1947년 3·1절 기념대회 이전까지 주요 정세>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1945년 8월 15일)

▷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1945년 9월 10일)

▷ 건준 제주청년동맹 결성(1945년 9월 말)

▷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1946년 2월 15일)

▷ 3·1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 결성(1947년 2월 17일)

▷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1947년 2월 23일)

3·1발포사건 이후 조천면에선 학생과 청년들이 주로 집회와 삐라 부착을 위주로 대중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림=김영화 작가)
3·1발포사건 이후 조천면에선 학생과 청년들이 주로 집회와 삐라 부착을 위주로 대중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림=김영화 작가)

이후, 3·1절기념대회에서 경찰 발포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남조선노동당은 3·1절기념대회 발포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읍면리 단위 구성한다. 이들은 '3·1사건' 진상조사 및 유가족과 피상자에 대한 구호사업 등을 전개하며 동시에 파업 계획을 마련한다. 이들의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가. 발포책임자 강동효 및 발포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나. 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즉시 책임 해임하라.

다. 피살당한 동포의 유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에게 충분 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라. 3·1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마. 경관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바. 경찰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제주읍내 각 직장 대표자들이 모여서 ‘제주읍 총파업단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직장별 개별 파업단 및 공동투쟁위원회가 조직되며 그 결과 도청과 우체국을 비롯한 관공서 23개소, 중등학교 13개교, 국민학교 92개교, 통신기관 8개소, 교통기관 7개소, 금융기관 2개소, 상사회사 및 공장 15개소 등 도내 166개 단체에 41,211명이 파업에 동참했다.(출처: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각, 2018)

경찰이 파업에 참여했다는 점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경찰 내부에서도 3·1절 발포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문지서의 경우다. 중문지서 경찰들은 파업 후 이틀 뒤인 12일 “우리 지서원 일동은 3·1사건에 부정한 행위를 한 경찰에 봉직할 수 없음으로 직장을 포기한다”는 요지의 사직원을 제출했다.

14일 오전 연평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주민 300여명이 참석한 집회가 열린 가운데 ‘3·1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림=김영화 작가)
14일 오전 연평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주민 300여명이 참석한 집회가 열린 가운데 ‘3·1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림=김영화 작가)

 

송시우 위원장은 3·10총파업을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로 규정했다. 3.1기념대회 군중을 향한 경찰의 발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미군정의 실정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다는 것. 송 위원장은 3·10총파업의 저항 정신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봤다.  아직 당시의 문제 제기가 유효하다는 것.

남북 평화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의 뜻보다 미국 대통령의 혀끝에 달려 있는 형국이다. 노동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죽음을 맞고 있다. 친일 잔재 세력은 틈이 보일 때마다 정치적으로 부활하면서 역사 왜곡을 도모한다. 이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3·10총파업과 마주하게 된다.

송 위원장은 1947년 3·10 총파업의 높은 참여율에 대해 “‘조직하라, 학습하라, 선전하라’의 3원칙을 잘 수행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재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같이 하도록 선전해서 알려야 한다. 그리고 조직을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바탕으로 촘촘하고 부드럽고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편, 이번 토론회는 올해 초 구성된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원들의 중간 성과 보고회의 성격을 지녔다.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이사,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편집국장,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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