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리. (사진=국립산림과학원)
성읍리. (사진=국립산림과학원)

20~30년 전만 해도 제주 관광 필수 코스에 포함됐던 성읍민속마을. 그리고 4·3 당시 끔찍한 집단학살이 벌어진 장소이지만 호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표선백사장. 두 곳 모두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방 이후 표선면의 사회적 분위기는 제주도 내 다른 지역들과 사뭇 달랐다. 일제강점기의 제주지역 항일운동가들은 강한 민족주의 의식을 바탕으로 했다. 이들의 운동은 해방 이후 자연스레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마을 청년들과 결합해 좌익 성격을 띤 단체를 꾸리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표선지역은 예외였다. 조직적인 면에서도, 활동적인 면에서도 유독 좌익단체 세력이 약한 곳이었다. 제주도 전역에 마을별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조직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2월이었다. 이들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와 발포사건 이후 3·10총파업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당케해변. 왼쪽에 세명주할망을 모신 당이 뒤쪽에 백사장과 바다가 보인다. (사진=조수진 기자)
당케해변. 왼쪽에 세명주할망을 모신 당이 뒤쪽에 백사장과 바다가 보인다. (사진=조수진 기자)


남로당 표선면 조직 구성 늦어져

하지만 표선면에선 남로당 마을 조직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표선면당을 조직할 인물이 지역에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표선면에 좌익 인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10총파업 조사팀이 확보한 당시 법원 판결문에선 제주도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던 표선면 하천리 출신 강성렬이란 인물이 확인된다. 그는 1946년 10월 무허가 집회 및 ‘불온한’ 격문을 붙인 혐의로 붙잡혔다.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47년 5월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항일운동가였던 성읍리 출신 조몽구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당 조직을 위한 활동에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 내 남로당 조직이 늦어지자 다른 지역 남로당 활동가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1947년 3월16일 성읍리 조몽구의 집과 표선리 양성보의 집에서 배두봉(하귀리 출신)·허두문(오라리 출신) 등 다른 지역 좌익단체 활동가들이 표선면 청년들을 남로당에 가입시킨 사실이 확인된다. 

표선초등학교. 옛 표선국민학교. (사진=조수진 기자)
표선초등학교. 옛 표선국민학교. (사진=조수진 기자)


3·1대회 준비는 성산면 단체에서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표선면당 조직 결성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이런 여건 탓에 다른 지역과 달리 표선면에선 1947년 3·1절 기념대회 준비위원회가 따로 꾸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표선면이 아닌 인근 성산면의 좌익단체가 대회를 준비했다.

조사팀이 확보한 ‘3·1사건 체계도’에 따르면 기념대회는 3월1일 오전 11시 표선국민학교에서 열렸다. 민청과 인민위원회, 부녀동맹을 포함해 청년과 학생 등 1000여명이 행사에 참석했다. 대회는 경찰의 허가를 받은 가운데 진행됐다. 다른 지역과 달리 시위 행렬이나 경찰과 충돌하는 일 없이 마무리됐다. 

3·10총파업 때는 13일 표선면사무소를 시작으로 14일 표선국민학교, 성읍국민학교, 가시국민학교, 화산국민학교 등에서 파업단이 결성됐다. 18일엔 표선면사무소에서 ‘표선면 파업단 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김민추 표선면장, 부위원장 송문평 표선국민학교장)가 꾸려져 표선면 직장 파업을 주도했다. 

같은 해 5월, 복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강성렬이 표선면당 조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집들을 직접 방문하며 남로당 입당을 권유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7월22일 가시리 안한봉의 집에서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로당 표선면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장은 현응삼, 부위원장은 강군열, 조직부장은 정두옥이 맡았다. 

옛 표선면사무소 터. 지금은 제주은행이 들어서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옛 표선면사무소 터. 지금은 제주은행이 들어서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다른 지역에선 8월15일을 앞두고 집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경찰과 무력 충돌사건도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표선면 지역의 두드러진 좌익단체의 대중투쟁 활동은 확인되지는 않는다. 

10~11월경 성읍리에서 송정석, 강평문, 강두근 등이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였던 성산면 출신 오용필 등과 모여 성읍리 세포조직을 정비한 사례, 11월 중순엔 가시리 강평직의 집에서 안재인, 현성우 등이 모여 좌익단체 조직 정비를 했던 사례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우익단체 결집 양상 뚜렷

반면, 표선면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우익단체가 결성되는 양상을 보였다. 

1946년 3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부’(위원장 김충희·이하 독청)가 발족했다. 곧이어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단장 김인선)가 창립됐는데, 이 두 단체는 1947년 대동청년단(단장 김인선)으로 결합하면서 도내 가장 대표적인 우익 청년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1947년 4월26일 독청 표선리 지부 결성대회가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위원장에 송방식이 선출됐다. 그는 이후 표선면 대동청년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 지역 유지나 우익 청년단체 대표가 주로 맡았던 경찰후원회 표선면 책임자는 송권은(송방식의 부친)이었다. 이들 우익단체는 남한 단독선거에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좌익단체와 대립하게 됐다. 

표선지서가 있던 곳에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사진=조수진 기자)
표선지서가 있던 곳에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리적 특성으로 근대 교육 확산 한계

일각에서는 표선면 지역의 좌익단체 활동이 미미했던 배경으로 교육 시설이 성읍에 집중된 점을 꼽기도 한다. 

제주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항구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과 교육 시설이 발달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집안은 자녀들을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내고 그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와 사회주의 등을 바탕으로 한 근대 교육을 확산하는 여건이 형성됐다. 

이와 같은 지리 및 경제적 여건을 따라 교육 환경이 조성되며, 좌익단체 세력이 확장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표선면의 경우는 항구가 있던 표선리가 아닌 성읍리가 지역의 중심이었다. 성읍은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읍성(邑城)이 있던 곳이었다. 500년이 넘도록 조선시대 행정구역이었던 정의현(제주도 동남부)의 현청이 있었다. 이 때문에 향교 등 교육 시설이 성읍에 몰려 있었다.

성읍리에서 1909년 설립된 정의공립보통학교가 표선리로 이전된 때는 1937년이었다. 다른 읍면에 비해서 해안 지역에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된 시기가 늦었다. 이렇듯이 성읍리가 바다와 맞닿아 있지 않은 지리적 특성 탓에 근대 교육이 확산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집단학살이 벌어진 표선 한모살. (사진=조수진 기자)
집단학살이 벌어진 표선 한모살. (사진=조수진 기자)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인용자료
1.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2.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3.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 3·1사건 체계도.

제주투데이는 지난해부터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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