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 4·3희생자위령비 뒷면.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 4·3희생자위령비 뒷면. (사진=조수진 기자)

4·3 당시 공권력에 희생됐으나 국가로부터 그 죽음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 배제된 희생자. 정부는 지금도 군경 토벌대의 진압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이들 또는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간부 등을 ‘희생자’에서 제외하고 있다. 

남원면은 ‘비(非)희생자’ 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다. 4·3 때 군 토벌대와 인민유격대가 가장 격렬하게 맞붙었던 의귀리 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 배경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원면 지역에선 일본이 조선인을 징용할 때 대부분의 구장(지금의 이장)이 사회주의 의식을 가진 청년들을 공출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이후 징용 갔던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구장과 지역 청년 간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 와중에 의귀리에선 양측 갈등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군정이 나눠준 전리품 광목이 발단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배분해야 했으나 의귀리에 배정된 광목을 일제강점기 때 구장이었던 김모씨가 가로챈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면사무소 직원 김계원이 비리를 폭로하면서 마을에 알려졌다. (남원면 인민위원장 또는 민청위원장을 맡은 것으로 추정되는 정창림도 같은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일제에 이어 미군정의 착취로 인해 쌓였던 분노와 징용 공출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김계원을 따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마을 이장과 청년 간 갈등은 4·3 국면을 맞아 군경 토벌대와 인민유격대 간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학살-보복학살로 이어진 마을 갈등

1948년 4월3일 인민유격대는 남원지서를 습격, 같은 해 11월 28일엔 남원리와 위미리 마을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인민유격대는 주민 80여 명(위미리 24, 남원리 54명) 가까이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일부 주민을 산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인민유격대가 떠난 직후 남원리에 도착한 토벌대는 도망가던 주민들을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보복학살에 나섰다. 당시 남원지서 주임이었던 일명 ‘마차주임’ 김승추는 중산간마을에서 해안마을 남원리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폭도’라며 닥치는대로 죽였다. 이 때문에 도로 산으로 도망친 주민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남원면은 학살과 보복학살이 반복되는 비극을 겪는 공간이 됐다. 이는 1949년 1월12일 의귀리 전투로 이어졌다.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초등학교. 1949년 1월12일 이곳에서 의귀리 전투가 벌어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초등학교. 1949년 1월12일 이곳에서 의귀리 전투가 벌어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의귀리 전투의 발단은 김모 구장과 마을 청년 간 갈등이라는 증언도 있다. 지난 2008년 제주4·3연구소가 진행한 천인 채록 중 양병윤(1926년생. 남원 의귀 출생)씨는 “의귀리 4·3사건 원인은 실지 젊은 사람들이 이장과의 충돌 그것이 제일 기원이랐어”라고 밝히고 있다.

인민유격대에 의한 마을 피해도 남원면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컸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제주4·3평화재단 발간)에 따르면 제주 전역에서 발생한 사망자 중 무장대에 의한 사망자 수의 비율은 전도 15.7%, 남원면은 26.0%로 10% 가량 높게 나타난다.(토벌대에 의한 사망자 비율은 전체 78.7%, 남원은 67.1%이다.)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에 조성된 4·3희생자위령비.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에 조성된 4·3희생자위령비. (사진=조수진 기자)

 

남원면의 3·1기념행사와 총파업

남원면의 경우 1947년 3·1기념행사가 오후 12시 남원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약 400명이 모였으며 이들은 행사가 끝난 뒤 남원리 일대에서 시위행렬을 이어갔다. 

<3.1사건 체계도>에 따르면 전달인 2월 중순쯤 남로당 남원면준비위원회(위원장 김대웅)가 결성됐다. 직후인 같은 달 19일 오전 10시 남원리 향사에서 3.1기념준비위원회가 꾸려진다. 위원장엔 오동학, 부위원장엔 현승균·정창림, 위원엔 김계원·김종시·현홍식·김윤호·강동현·김대웅 등이다. 이들은 각 단체 및 주민을 전부 동원해 3.1대회에 참석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동학 남원면 인민위원장은 1947년 2월 19일 남원면 민청결성대회(민청위원장 현승균)를 개최하여 삼일절 합동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1947년 3월 1일 남원국민학교 교정에서 기념식을 거행한 후 거리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제4조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오동학의 판결문, 제주지방심리원, 1947년 4월 28일)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 남원초등학교.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7일 촬영한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 남원초등학교. (사진=조수진 기자)

3·1발포사건 이후 총파업(대책위원장 정창림)의 열기도 뜨거웠다. 3월11일엔 남원·위미·의귀·신례·하례·태흥국민학교에서 파업단이 꾸려졌다. 다음날인 12일엔 남원국민학교에서 교원조합(위원장 강영준, 부위원장 김계호, 총무부 오성사 외 17명)이 결성됐다. 

정창림은 3·1발포사건이 나자 남원면 대책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2월 19일 무허가집회에 참석하고 같은 해 3·1절 기념식 때 시위행렬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47년 9월 12일 제주지방심리원에서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정창림의 판결문, 1947.09.12.). 

13일엔 남원면사무소에서 파업단이 꾸려졌고 14일엔 남원면사무소에서 남원면 파업단 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현중홍, 부위원장 오성원·오권길, 위원 김종시·현홍식·강동현·김대웅·오성사· 정창림·김계원)가 결성되면서 남원면 전역에 총파업이 이어졌다. 이들은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파업을 계속하기로 뜻을 모았다. 

제주신보사가 전개한 3·1발포사건 희생자 유가족을 위한 조위금 모금에 남원면에선 현중홍 외 95명이 2750원을 후원했다. 
 

빈 위패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엔 희생자들의 이름이 모셔져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듬성듬성 비어있는 위패가 눈에 띈다. 대부분은 추가로 희생자 결정이 될 이들의 공간이거나 희생자 중복 접수 건에 해당하지만 9개는 다른 사연이 있다. 

지난 2002년 4월3일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자매인 할머니가 어릴 적에 잃은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위패가 눈에 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2002년 4월3일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자매인 할머니가 어릴 적에 잃은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위패가 눈에 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6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하고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가 주관한 대중강좌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그리고 제주4·3’ 강좌에서 김민환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교수는 “‘빈 위패’는 국가가 여전히 희생자를 선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2023년 한국 사회가 4·3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9개의 빈 위패는 ‘희생자’에서 배제된 희생자들의 흔적이다. 

김 교수는 “4·3평화공원은 70여년 전 4·3의 기억을 재현하는 공간이지만 기본적으로 선택과 배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공원’이라는 시설에 모든 걸 다 담을 순 없으니 무엇을 전시할까(보여지게 할까)에 대한 선택과 배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빈 위패’는 배제된 기억이다. 국가가 배제하고 있는 진실이다. 70여년 전 공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해 ‘국민’에서 제외한 정부.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희생자’와 ‘비희생자’로 선을 긋는 정부. 70년이 지났지만 국가는 여전히 ‘선별’한다. 

빈 위패 중 하나는 인민유격대로 활동했던 김계원의 자리다. 김계원은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을 통해 정뜨르비행장(지금의 제주국제공항 부지)에서 처형 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3월3일 제주시 오라동에서 김동화씨가  3·10총파업 조사·연구팀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3월3일 제주시 오라동에서 김동화씨가 3·10총파업 조사·연구팀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3월3일에 만난 김계원의 아들 김동화씨는 “아버지의 희생자 결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재심만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무죄 선고만 받으면 명예회복이 되는 거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디에 매장했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탄하며 “적법한 절차 없이 재판을 받았다고 하면 희생자든 아니든 똑같이 무죄인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인용자료
1.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2.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3.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4. 3·1사건 체계도.

제주투데이는 지난해부터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이사,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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