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기념관에는 제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눕혀 놓은 비석이 있다. 4·3백비라 부른다. 저 비석은 법률적으로 ‘제주4·3사건’이라 불리고 있는 역사가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릴 때 바로 설 수 있다.
‘4·3 정명’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주요 과제이자 도달해야 할 목표 중 하나로 여겨진다. 정명은 단순히 법률적 용어를 고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역사에 대한 국가적인 이해와 화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곧 4·3 발발 75주년이다.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는 4·3의 정명을 말한다. 그러나 말만 무성하다. 구체화를 위한 작업들은 보이지 않는다. 공식적인 논의의 장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 역시 4·3정명을 말한 바 있다. 오 지사는 도지사 당선인 신분이던 지난 6월과 취임 100일이 되던 날 4·3 정명을 거론한 바 있다. 그는 4·3 정명을 위해서는 미국의 책임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가 추가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2018년 3월 31일에는 백비가 세워졌다. 백비에는 ‘4·3민중항쟁’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백비가 세워진 건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기념사업위원회와 민주노총이 공동 주최한 ‘4·3민중항쟁 70주년 정신계승 범국민대회’에서였다. 정부의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4·3에 대한 제주 민중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듯 시민사회와 정치인들은 4·3 정명을 얘기해오고 있다. 그러나 정명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4·3 정명은 4·3의 성격에 대해서 국가가 정의를 내리는 작업이다. 국가는 아직까지 4·3의 성격에 대해 제대로 정의를 하지 있다.
4·3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지 논의를 위한 자료로 쓸 수 있는 자료는 지난 2017년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공개한 <제주4·3에 대한 인식 및 해결과제에 대한 도민여론조사>와 제주4·3평화재단의 전국민 대상 여론조사가 전부다시피 하다. 두 여론 조사는 질의 내용 중 중 4·3의 성격과 관련한 질문을 포함시켰다. 그 이후로는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4·3해결과 관련해 퇴행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4·3은 흔들리는 모습이다. 미국의 책임 규명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오 지사는 정명을 위해 미국의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책임 규명이 따르지 않는다면 4·3의 정명은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를테면 전시작전통제권뿐만 아니라 ‘역사기술권’까지 미국에 부여하고 있는 형국은 아닌가.
4·3에 대해 얼마나, 어디까지 규명을 해내야 제주특별자치도가 주체적으로 정명 논의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4·3 정명을 위해 제주도가 어떤 작업들을 수행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체적인 역사 기술을 위해 제주도는 무엇을 해야 할까.
3·10총파업의 전개 과정과 그 의미를 밝힌 [4·3에서 3·10총파업의 의미와 계승 과제 토론회](11월 30일) 참석자들은 4·3 정명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3·10총파업이 4·3 무장봉기로 이어졌지만 3·10총파업에 의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으며, 4·3 정명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날 토론회 참가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해방 후 제주 역사의 수레바퀴는 1947년 3·1절기념대회 발포사건에서 3·10총파업으로, 그리고 이듬해 4·3항쟁으로 이어진다. 3·10총파업의 의미를 제대로 밝힐 때에 제주 민중이 끌어가는 수레바퀴가 4·3의 정명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임기환 민주노총 제주본부장은 3·10총파업은 4·3항쟁이 일제강점기 제주 민중의 해방 운동을 계승하고 있고, 3·10총파업이 그와 같은 지점을 보여준다는 의견을 밝혔다.
임기환 본부장은 1945년 9월 청년동맹과 1947년 1월 25일 제주도 부녀 동맹 등이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잔재 및 유물 철폐 △무산 농민의 해방을 위한 토지 개혁 등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봤다. 건국준비위원회, 제주도인민위원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도 강령과 정책 노선 등을 통해 일제 잔재 청산, 토지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3·10총파업과 4·3항쟁 이전에 무산 계급을 위한 사회 건설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임 본부장은 “1947년 3·1운동 기념 투쟁과 3·10총파업 다음에 4·3봉기로 이어지는 항쟁이 제국주의 타도, 급진적 개혁을 통한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일제강점기 해방운동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947년 3·1운동 기념대회 결의 내용(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남조선 민주개혁 토대 마련 반동세력 분쇄로 국제협조와 평화 확보 전 인민의 일치 단결로써 민주 문제 해결에 매진하자) 등을 통해 4·3무장봉기가 일제강점기 해방 운동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4'·3 정명', 민중해방운동으로 헌법 전문에 포함될 때 궁극적으로 완성"
임 본부장은 그 근거로 “3·10총파업은 4·3 항쟁의 혁명적 대중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며 그 근거로 △3·10총파업의 투쟁 목표(일제 통치기구 분쇄와 봉건 잔재 일소, 토지 개혁과 진보적 노동법령의 시행,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식민지 봉건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통한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166개 기관단체에서 4만1211명이 참여한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총파업 규모 △3·1운동 기념투쟁의 결의를 실천한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는 3·1운동기념대회와 3·10총파업, 4·3항쟁의 과제가 현재도 유효하며 3·10총파업의 정신과 대중적 전 민주적 운동 방식은 한국 사회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에게 4·3정명은 4·3특별법 개정을 통한 법률적 용어 변경을 넘어 한국 사회를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할 해방 운동의 역사로 헌법의 전문에 포함될 때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찬식 박사(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는 4·3 정명에 대해 “이름을 정해가는 운동이지, 가치관을 따지는 운동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가치관을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 그는 4·3정명을 위해서는 두 가지 고리를 풀어야 한다고 봤다.
3·1운동기념대회의 경찰 발포 및 시민 사망 사건에 따른 즉각적인 폭력적인 대응이 아니라 열흘의 시간을 거친 뒤 총파업으로 이어지게 된 이유,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흐른 4월 3일에는 무장 투쟁으로 결행되었는지에 대해서다.
즉, 1947년 3·1운동기념대회와 3·10총파업, 이듬해 4·3 무장봉기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며 이 각 사건들의 필연성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
"조직이나 이념으로 접근하면 제주4·3은 이해하지 못해"
박찬식 박사는 “총파업이라고 하면 노동운동가 중심의 파업을 연상하는데 (3·10총파업은) 그것과는 달랐다.”며 “부녀자, 청년동맹. 이런 조직적인 움직임도 있었지만 학교가 상당히 중심이 됐다는 특성이 있다. 파업도 학교가 중심이었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계급투쟁적인 성격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광범위했다. 조직적이었다기보다는 상당히 온건하고 대중 친화적이었다. 조직적인 면에선 느슨했다. 조직적으로 얘기하면 상당히 부족했다.”며 “조직적인 차원이나 이념적인 차원-이데올로기로 접근하면 제주4·3은 이해하지 못한다. 연구자들의 글을 통해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공감하는 게 뭐냐면 제주 공동체에 관통하던 하나의 흐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수의 난으로 대표되는 제주 민중의 저항 정신이 해녀항일투쟁 등 비롯한 전도적인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고,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왔다는 것.
박찬식 박사는 3·10총파업과 4·3의 연계성을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4·3 정명이 전도민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제주 공동체 내에서 유족회도 공감하는 이름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화와 노동·농민·통일운동으로서의 4·3규명 진전 이뤄져야"
토론회 좌장을 맡은 박성인 제주투데이 이사는 토론 맺음말에서 민주화운동과 노동 운동의 역사로서 3·10총파업과 4·3의 의의를 밝혔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노동 운동의 흐름 속에서 두 역사적 사실을 살펴야 한다는 것. 통시적 관점으로 70년이 넘은 두 역사적 사실의 현재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연결되지를 정립해야 제대로 4·3을 정명할 수 있으며, 이후 4·3 진상 규명의 역사도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연결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저는 4·3 진상 규명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게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이 87년 6월 민주항쟁과 7, 9월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져 왔는데 오늘날 분리돼버렸다.”
박성인 이사는 이어 “민주주의 운동에서 우리 사회 전체를 민주화해 나가는 문제와 특히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생산의 현장, 생활의 공간, 마을 민주주의와 결합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진전은 항상 거꾸로 역행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확인했다.”면서 “그런 점에서 저는 4·3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으로서의 규명에 진전하는 만큼만 해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