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으로 잘 알려진 성산포. 지금은 도민의 반발이 거센 제주 제2공항 건설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들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여러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유명세’를 가진 것과 달리 100여년 전만 해도 성산포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었다. 1935년 성산면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 정의면으로 불렸을 당시 이 지역은 고성리가 중심이었다.
#제주 동부 지역 주요 거점 항구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초반부터 성산포 항구가 개발되면서 성산리가 이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해조류를 활용한 아이오딘(또는 요오드) 제조공장과 통조림공장, (소라·전복 껍데기를 활용한) 단추공장 등이 모여 공장지대가 형성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관동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품 납품에 이용되던 지역 중 하나다.
산업과 경제가 발달하자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경찰관주재소와 등기소, 우편소, 학교 등 공공기관 역시 잇따라 세워졌다. 해양 관세 업무를 담당하던 세관 감시서도 1910년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이곳 성산포에 들어섰다.
이 과정은 당시 공식적인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4년 전라남도 제주도청이 펴낸 <미개의 보고 제주도>에선 “성산포는 어선기항지가 되고 또 어업근거지가 되어 일본·조선 상인이 집중, 조개단추와 통조림, 조제옥도(요오드 또는 아이오딘 제조) 등의 공장지로 알려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¹
#일본인 선원 200명에 맞서다
정의면(성산면)은 청년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이 펼쳐졌다. 지역 청년은 일제 치하에서도 교사로서 또는 소년단을 만들어 대중에게 근대 의식을 퍼뜨려 나갔다. 이들이 일본에 저항한 대표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성산포 씨름사건’이다.
1927년 5월 정의면 청년회가 성산포에서 면민 씨름대회를 열었다. 마침 일본 어선단이 입항했다가 일본인 어선에 탔던 선원 200여명이 씨름판을 구경했다. 선원 중 씨름꾼 한 명이 씨름 대결에 나섰다가 패배하자 재대결을 요구했다.
이때 청년회 간부였던 심판이 “시간 관계상 한판으로 끝내야 한다”며 거절하자 일부 선원들이 심판의 뺨을 후려쳤다. 이를 본 일부 청년회원이 선원의 무례함을 따지자 모든 선원들이 각목과 의자 등을 집어들고 정의면 청년들과 격투를 벌였다.
현장에 있었던 경찰관은 이 싸움의 원인이 일본어선 선원에 있다고 했지만 경찰 당국은 주민만 붙잡아 재판에 회부했다. 씨름사건은 일제 탄압과 수탈 등으로 인해 쌓였던 주민들의 분노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 중 하나다.²
#항일운동 씨앗 싹트다
씨름사건이 있고 3년 뒤 1930년 해녀조합이 해초를 부정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자 해녀와 청년들이 저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산포 해초 부정 판매 사건’이라 불리는 이 일은 2년 뒤 성산면과 구좌면 지역 해녀들이 대거 봉기한 해녀항일투쟁의 발단이 됐다.
1930년 당시 해산물은 경매를 통해 지정가격이 붙었다. 이를 조합이 관리했는데 지정가격은 보통 시가의 절반 수준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책정하면서도 조합 서기가 상인과 결탁해 지정가격보다 더 낮은 가격을 매겼다. 그러자 해녀들이 지정가격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조합에 항의했다.
조합이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해녀와 지역 청년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당국의 행태를 규탄하는 글을 써서 성산포를 비롯 구좌면 일대에 퍼뜨렸다. 이 소식은 제주 섬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이를 계기로 청년과 해녀들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연대하는 경험을 깨친다. 이 자각은 2년 뒤 제주를 대표하는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3·1운동 정신, 완전 독립으로 이어가자!”
해방 직후 성산면 인민위원회는 현호경이 주도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산면 인민위원회가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은 아니다. 성산면장을 지냈던 강인옥은 “당시 시흥리 인민위원장의 경우 좌익계통과는 관련이 없으며 1946년 5월까지도 정규 이장처럼 마을 행정일을 봤다”고 증언했다.³
성산면에서 3·1기념대회 준비위원회가 꾸려졌는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3·10총파업 조사팀이 확보한 판결문과 3·1사건체계도 등에 따르면 기념대회 사전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던 청년들로 구성된 조선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 성산면 핵심 간부들은 1947년 2월24일부터 25일까지 이틀에 걸쳐 3·1대회 개최를 알리는 전단지를 성산리 일대에 붙여 홍보했다.
전단지 내용엔 “3·1운동 투지(鬪志) 계승은 완전 독립 쟁취다”, “민주경찰관은 무기를 놓고 시위에 참가하라” 등이 포함됐다. 2월26일 온평리에선 “28주년 3·1기념대회 참가하라” 내용이 적힌 전단지가 작성된 사실도 판결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학교 운동장 아닌 공장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
3·1사건체계도에 따르면 성산면 3·1기념행사는 경찰 당국의 허가를 받아 1947년 3월1일 오전 11시 성산포 제일 요오드공장 광장에서 열렸다. 민청과 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마을 청년과 학생 등 1200여명이 참석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행사가 열린 장소다. 다른 지역은 보통 학교 운동장에서 집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산포에선 학교 운동장이 아닌 공장 앞 광장에서 주민들이 모인다. 왜일까.
당시 성산포에서 가장 가까운 성산동국민학교(지금의 성산초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원래 1919년 일본인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성산포동공립고등소학교가 시초다. 해방 직후 성산포 주민들이 학교 건물을 인수해 1946년 2월22일 성산동국민학교로 문을 열었다. 학급 수가 2개, 학생 수가 20여 명 수준으로 운동장도 크지 않았다.
또 고성리에 위치한 성산포서공립국민학교(지금의 동남초등학교)는 학급 수가 6개, 학생 수 300여명 규모였다. 성산동국민학교보단 크지만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성산포에서 거리가 멀어 집회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많은 주민이 모일 수 있었던 곳은 성산포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던 요오드공장의 마당이었다. 1947년 당시 제주도의 주요 공업생산물은 무수주정(무수 알코올)과 요오드였다. 그 생산량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을 정도로 공장 규모 역시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 따르면 고성리 민청원 50여 명은 3월1일 오전 8시쯤부터 오관형의 지휘에 따라 고성리에 위치한 성산포서국민학교 앞까지 시위행렬을 벌였다. 이들은 경찰들이 막아서는 데 아랑곳하지 않고 성산포 지역 민청원들과 합류해 거리 시위를 이어갔다. 500여명에 이르는 시위행렬은 성산포 통조림공장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기념식이 끝난 뒤 모두 해산해 경찰과 충돌 없이 진행됐다. 온평리 청년 40여 명은 요오드공장 광장에서 성산리 일대에 걸쳐 시위행렬을 이어갔으나 성산면 전체로 보면 제주읍이나 대정면처럼 대규모 시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공장도, 학교도, 우체국도 모두 파업에 동참
공장이 많았던 성산면에서도 대부분의 직장이 총파업에 동참했다. 이 사실은 판결문과 3·1사건체계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3월13일 협신제약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성산포 요오드 제2공장, 3월14일 제1공장에서 파업이 이뤄졌다. 우편국도 파업에 들어갔다.
학교 교사들의 파업 동참 열기도 뜨거웠다. 3월11일 성산포서국민학교에서 지역 내 교원 20여명이 모여서 제주도교원조합 성산면지부를 조직하고 이 자리에서 “시위파업 절대자유”를 결의했다. 이는 3월19일 신산공립국민학교에서 이뤄진 성산면 내 학교 교원들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좌익 청년단체들은 파업과 함께 집회를 열거나 전단지를 붙이는 활동을 했다. 제주신보사가 전개한 희생자 조위금 모금에도 지역 공공기관과 사회단체들이 적극 나섰다. 1947년 6월15일 마감한 모금 현황을 보면 성산면사무소 750원, 성산면 내 학교 5770원, 성산면 중등학우 1342원 등이다.
#총파업 이후…좌익세력 약화, 우익단체 결집 분위기로
성산면 지역은 3·1기념행사와 총파업 이후 미군정의 탄압으로 좌익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반면 우익단체는 한국독립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 성산면 지부를 중심으로 세를 키워갔다. 이와 함께 1947년 10월15일 대동청년단 성산면지부가 결성됐다.
게다가 1947년 5월 철도경찰 9명이 성산포지서로 배치되면서 제주 출신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게 됐다. 아울러 서북청년회 단원들도 성산면으로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제주도 다른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좌익단체의 대중투쟁이 성산면에선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같은 해 8·15기념일을 앞두고 다른 마을에선 집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경찰과 사회주의 운동단체 간 무력 충돌 사건도 빈번히 일어났으나 성산면에서 두드러진 활동이 지금까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좌익단체가 이런 상황에서 손놓고 있진 않았다. 조직 재편을 통해 세력을 다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3·1사건체계도에 따르면 같은 해 2월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성산면위원회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자 5월 오관형 등이 재건을 논의해갔다.
이때 마을별 하부 조직을 꾸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판결문에 따르면 1948년 1월 성산면당 간부 오관형·한신화와 고성리 1·2구, 온평리, 수산리, 시흥리, 오조리 등 책임자들이 함께 모여 2·7구국투쟁에 대해 논의한 일이 확인된다.
#남로당 탈퇴 성명서, ‘총살자 명부’였나
한편 2·7사건 이후 성산면에서는 남로당 탈퇴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청년들이 여럿 생겨났다. 1948년 3월 10일 성산면 관내 성산리·오조리·시흥리·고성리·수산리·온평리 등 6개 마을의 청년 66명이 대거 남로당 탈퇴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제주를 떠난 사회운동가 현호경의 조부 현승오의 명단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의 남로당 가입을 입증하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성명서는 당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것이며, 4·3봉기 발발 직전 성산면 청년들이 경찰과 서청의 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던 성산면. 현재 4·3과 관련한 성산지역의 역사는 터진목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저항의 기억을 다시 재조명할 때가 아닐까.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인용자료
1.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2. <성산포지 해뜨는 마을>.
3.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1권.
전문가와 한뼘 더 들어가기
※현승오-현길홍-현호경 3대에 걸친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현호경(玄好景, 1910~1949)은 성산읍 성산리 출신의 항일운동가이자 해방 후 성산면 핵심 사회운동가이다.
조부 현승오(玄承五)는 원래 성산읍 시흥리 출신으로서, 구한말 개화문명에 눈을 떠서 근대 산업에 관심을 가졌다. 성산포에 통조림공장과 단추공장을 설립하여 성산면 관내 최고 부자가 되었다. 현승오는 성산공립보통학교(현재 고성리의 동남초등학교, 4·3 당시 성산서국민학교) 설립(1923)과 운영에 앞장서기도 했다.
부친 현길홍(玄吉弘)은 일찍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에 재일 조선인 아동들을 위한 낭화(浪華)야학원을 설립하고 상무 겸 원장으로서 많은 민족청년들을 배출시켰다. 오사카 지역의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간회 활동을 벌였으며, 1930년대 초 제주인들의 제주-오사카 직항로 자주운항을 주도했던 동아통항조합의 조합장으로도 맹활약했다.
현호경은 어릴 적부터 일본으로 건너가서 생활했다. 도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이 주로 활동하던 오사카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9월 일본공산당에 입당, 1933년 오사카시 동(東)지구 시위원회(市委員會)의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4년 4월에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5년 1월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당시 1국1당 원칙에 따라 일본공산당에 입당해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의 형 현호진(玄好珍)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 토건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벌였고, 누이 현호옥(玄好玉)도 전협 오사카 화학노조 부인부장으로 투쟁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제주로 귀향한 현호경은 곧바로 조부의 통조림공장과 단추공장을 인수받아 재가동에 주력했다. 한편으로는 제주도 건준 결성 때 성산면 대표로 참석,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이어서 조직된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선전부장을 맡는 등 성산면을 벗어나서 제주도 전체 조직의 간부로 활동했다. 일본에서의 항일 노동운동 전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이러한 좌익 활동이 거슬렸는지, 미군정 당국은 그에게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워 재판에 회부했다. 그가 운영하던 공장의 종업원 33명에 대한 조선생활품영단의 양곡 수령 배급 과정에서 중간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결국 1946년 7월 29일 제주지방법원의 미군정 재판에서 사기죄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947년 2월 23일 치러진 제주도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자리에서 “눈앞에서 투쟁하는 현호경에게 격려금과 의복 등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던 사실에 비추건대, 당시 제주도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그의 검거 사실을 단순 사기 사건이 아니라 운동가에 대한 탄압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결국 1947년 3·1기념집회와 3·10총파업 때 현호경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현장을 지키지 못했으며, 석방 후에도 귀향하지 않았다. 이듬해 4·3봉기 때에도 제주에서의 활동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유족의 말에 따르면, 그는 목포에 거주하다가 이모가 살던 부산으로 옮겨서 생활하던 중 1949년 봄, 부인 홍순옥을 미행한 형사에게 붙잡혀 제주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1949년 여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2일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숙모 탁명숙(제주보육원장, 함경도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이 경찰서에 수감 중인 현호경에게 사상 전향을 권유했으나, 지조를 지켜서 총살장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현호경의 유해는 2008년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되었다. 이후 유전자 감식 과정을 거쳐서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4·3 당시 현호경으로 인해 일부 가족이 연좌 피해를 입었다. 누이 현호월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고, 그녀의 남편 고용진이 행방불명됐다. 일본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여동생 현호옥은 1950년 6·25전쟁 직후 성산포경찰서에 예비검속 후 석방되었다. 현호옥은 2019년 8·15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현재 성산포에서 <현승오-현길홍-현호경 남매>로 이어지는 현씨 3대의 근현대사 이야기는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성산포 자립 경제를 개척했던 공장 터도 표지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 성산포 최고의 부호 가문이며 지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 4·3을 거치며 붉은색 낙인이 찍혀서 버림받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