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2공항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들은 15년 전 해군기지 건설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당시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필자는 지역 언론매체에 이에 대한 반대 기고를 쓴 적이 있는데, 기사에 딸린 한 줄 댓글에 큰 상처를 입은 기억이 있다.
‘빨갱이’라는 세 글자.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고 사람과 자연이 어울려 사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한 이유로 빨갱이가 되고 말았다. 빨갱이의 정의가 그러하다면 필자는 빨갱이가 맞다. 어릴 적부터 평생 달고 있는 ‘안면홍조’ 증상으로 ‘얼굴 빨갱이’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이는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이에 필자가 과도하게 상처받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배우는 악플에 대해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쓰레기는 안 받으면 그만이다. 그걸 받으면 나도 쓰레기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악플에 신경을 끄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는 제주도민인 필자에게 단순한 악플이 아니었다. 빨갱이보다 더한 악플이 있을까.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경제발전주의
‘레드콤플렉스’. 4·3 이후 제주도민들은 반공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고자 지배이데올로기에 순응해야 했다. 따라서 빨갱이는 무서우면서도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4·3 유족 2세대인 필자에게도 지배 담론으로서 ‘빨갱이’라는 언어가 체화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반공주의의 이면에는 경제발전주의가 드리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4·3 이후 근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사회는 반공주의와 경제발전주의를 내세운 국가체제를 확립해왔다. 특히, 제주 사회는 ‘변방의 섬’이자 ‘빨갱이의 섬’이라는 소외와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발전주의를 최고의 이념이자 발전 방안으로 확산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의 지역 발전에 대한 욕망과 지역사회 리더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평화·안전·생태를 외치는 10대들의 등장
현재 지역의 주요 의사결정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중장년층 도민들 역시 경제발전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개발에 반대하더라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문제삼지만, 제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공론장에서 찾기는 어렵다.
이러한 때 얼마 전 평화, 안전, 생태의 비전과 가치를 이야기하며 제2공항 추진을 반대하는 10대들의 등장은 너무나 신선했고 더 나아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것이 양용찬열사의 정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존재가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날 전지구적인 생태 위기 및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비롯된 팬데믹 상황에 직면하여 대안적인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요구가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선언적이고 규범적인 수준을 넘어 일상적인 생활양식이자 노동양식으로써 전반적인 삶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미래세대에게 개발로 강화될 기후위기는 생존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는 청소년들>은 얼마 전 기자회견을 통해 제2공항은 청소년 당사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평화, 안전, 생태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문제 제기는 당사자의 정체성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4·3의 정신이자 가치이기도 하다.
지금의 결정은 7세대 동안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누가 제주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인가. 누가 제주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인가. 미국 원주민 사회에는 ‘7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라는 윤리가 있다고 한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7세대 동안 자손들의 삶에 미칠 영향을 먼저 고려하자는 것이다. 7세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현세대와 미래세대를 지탱하는 환경과 인간들 간의 관계를 둘러싸고 우리는 어떠한 제주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 못지않게 중요하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미래세대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필자는 이렇게 멋진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가 너무 부럽다. 평소 부러운 감정은 ‘도둑놈 심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번만은 기쁜 마음으로 부러움을 만끽하고 있다.
강경숙.
대학 졸업 후 찾아간 여성단체 활동이 삶의 방향이 되었다. 여성운동을 더 잘하고 싶어서 여성학을 공부했고 이후 제주에서 여성주의 교육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문제에는 젠더(여성)가 없고 젠더(여성)문제에는 지역이 없는 현실’에 대해 주목하고, 주변화된 위치에서 제주 사회의 성찰을 시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