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새해 첫 도정 현안 및 정책 공유회의에서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지역사회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공직 내부에서 불거진 성비위 관련 문제를 언급하며 조직문화 혁신을 위한 ‘성인지 감수성’ 함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무쪼록 새해 벽두부터 강조된 사안인 만큼, 공직사회를 시작으로 성인지 감수성 향상을 위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을 이야기하는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단지 말이나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 행동과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지금껏 지역의 리더들이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면서 내뱉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하는 우려이다. 특히 젠더 문제에 관련했을 때 그러하다.
무지의 권력, 오만한 무지
더 문제적인 것은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무지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행태이다. 공식 석상에서 제주도의 주요 현안 사항인 ‘행정체제’, ‘제2공항’, ‘15분 도시’ 등에 대해서 잘 모른다거나 어렵다고 말하는 경우는 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이나 성평등과 같은 개념은 잘 몰라도 되며 그렇다고 큰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해가 쉽지 않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이 용어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예로 토론회와 같은 공개석상에서, 가부장적 제도는 지역사회에서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성차별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성/평등에서 ‘성’을 삭제하자거나 이제는 여성을 넘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제안이 이루어진다.
지역 사회의 리더들인 이들은 가부장제라는 틀을 벗어날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가부장제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 성평등과 여성 인권에 대해 사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15분 도시’ 관련 토론회에 나와서 ‘15분 도시’에서 ‘15분’을 삭제하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탈식민이론에서 말하는 ‘인가된 무지(sanctioned ignorance)’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식민지배자가 피지배자의 관념이나 문화를 두고 자신에게 스스로 허용하는 오만한 무지를 의미한다. 한편 위 사례는 말 그대로 ‘무지라는 권력’의 한 사례일 뿐이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희롱이나 성폭력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저출생과 돌봄 문제, 다양성과 민주주의의 문제와 모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지역의 주요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에서 보여지는 남성들의 과도한 대표성에 대한 문제나 젠더 관점의 필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매우 낮다.
오늘도 지역에서 개최되는 많은 토론회와 포럼의 패널은 대부분 중장년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잠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토론회에서는 남성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단골 멘트로 등장한다. 때문에 성별이나 연령, 분야별 패널 선정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기획하고자 하는 노력이 따른다. 그러나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된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구조에 여성 및 다양한 구성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 성인지 감수성은 왜 중요한가?
한국사회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확산되는 데에는 ‘미투운동’이 큰 몫을 했다. 그 이전에도 성주류화 정책의 일환으로 성인지 감수성 향상을 위한 교육이나 정책이 이루어졌지만,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투운동 이후 가장 보수적이라는 법원에서도 성범죄 소송 시 재판부의 판단 기준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침을 마련했을 정도이다.
또한 점점 더 고도로 개인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성별로 인한 제약이나 차별의 문제는 저출생과 고령화, 지방 소멸로 이어지는 매우 큰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다양성과 차이가 중요하게 고려되는 현대 사회에서 성인지 감수성의 함양은 선택이 아니라 시대에 발맞추고 시대를 예견하기 위한 시민의 필수 요건이다.
특히 지역 리더들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성인지 감수성이 필수 덕목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제주 사회가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성인지 감수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지금 시대 리더의 자세다.
강경숙.
대학 졸업 후 찾아간 여성단체 활동이 삶의 방향이 되었다. 여성운동을 더 잘하고 싶어서 여성학을 공부했고 이후 제주에서 여성주의 교육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문제에는 젠더(여성)가 없고 젠더(여성)문제에는 지역이 없는 현실’에 대해 주목하고, 주변화된 위치에서 제주 사회의 성찰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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