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역은 비단이랏쥬
제주시 내도동 해안에 두리빌렛당이 있습니다. 이 당의 주인은 용녀부인입니다. 내도동 웃당에 좌정하던 용녀부인은 매 년 음력 2월, 해녀의 숨비소리를 듣기 위해 두리빌렛당으로 내려옵니다. 동짓달에 되면 겨울 바람을 피해 다시 웃당으로 올라갑니다. 용녀부인은 왜 2월에 두리빌렛당으로 내려올까요? 해녀의 숨비소리는 1년 내내 들리는데 말입니다.
용녀부인은 음력 2월부터 동짓달까지 열일하지만, 내도동 해녀들은 음력 2월이 지나면 기도빨이 떨어진다고 조용히 귀뜀해줍니다. 이는 아마도 음력 2월이 한 해 첫물질이 시작되는 때이며, 무엇보다 미역대조문(미역채취)의 시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력 2월, 한 달이면 끝나버리는 미역대조문은 내도동 해녀뿐 아니라 제주 모든 해녀들의 골든타임이며, 신과 인간의 긴밀한 즐탁동시가 요청되는 시간입니다.
제주 바다에는 '여'가 많습니다. '여'는 해녀의 일터이기에 당연히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중 ‘조각여’는 대부분 해안마을에 하나씩 있을 정도입니다. 귤에 조생귤과 만생귤이 있듯, 미역에도 ‘조곽’早藿과 ‘만곽’晩藿이 있습니다.(藿:미역 곽) '조각여'의 '조각'은 일찍 자라는 미역, '조곽'이 자라는 '여'를 말합니다.
전년 10월 중순부터 싹을 틔운 미역은 다음 해 음력 2월이 되면 숲을 이룹니다. 하지만 미역이 풍성히 자랐다 하여 미역을 맘대로 채취할 수는 없습니다. 마을마다 미역채취를 허하는 미역허채는 한날 한시에 시작됩니다. 미역허채를 알리는 깃발이 내려가면 온 마을 해녀들은 바다로 풍덩 빠집니다. 해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히어가는(헤엄쳐 가는) 곳이 바로 '조각여'입니다.
음력 3월 미역허채가 시작될 무렵, 표선 동하동 해녀는 모두 주어코지 주변에 모여듭니다. ‘주어망’은 미역허채 신호를 알리는 깃발을 세우는 곳입니다. 모든 해녀들이 깃발을 잘 볼 수 있도록 주어코지 해변에 돌을 쌓아 높은 단을 만들었습니다.(제주 지역마다 미역허채 시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제주의 서쪽 한림읍의 미역허채는 음력 4월입니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개국공신에게 울산 앞바다의 '곽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조선사람의 반은 제주 미역을 먹었다."(고광민, 제주생활사,2016,한그루)
이렇듯 한반도 백성의 미역사랑 덕분에 제주 미역은 좋은 값으로 육지에 팔려나갔습니다. 제주 백성은 미역을 판 돈으로 쌀, 소금, 면포를 구입했습니다. 이렇듯 귀한 미역이었기에 해녀 할머니는 "메역은 비단이랏쥬."라고 말합니다.
사진을 보면 그냥 ‘미역조문’이 아니라 클 대자를 붙여 ‘미역대조문’이라고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역대조문은 약 한 달간 진행되지만, 1등품 미역은 보통 열흘이면 채취가 끝납니다. 열흘 중 단 하루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전에 아이를 낳고 오후에 물질했다는 대평리 해녀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작은 알 수 없으나 제주 미역의 전성시대는 1960년대 말에 막을 내립니다.
경남, 기장 지역에서 미역양식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제주 미역의 가격이 폭락하고 제주 해녀의 활력이 시들어가던 시기, 전 국민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 한일협정이 체결됩니다.
하지만 제주 해녀에게는 해산물 수출을 위한 고속도로가 뚫린 셈입니다.
이제 제주 해녀들은 ‘조각여’를 뒤로 하고, ‘구재기여’(뿔소라), '빗창여'(전복), '미여'(해삼)에서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미역이 귀하고 듬북(거름용 해조류)이 급했던 시절, 전복과 소라 등을 따는 것을 ‘헛물애질’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미역양식으로 ‘미역대조문’이 사라지고 화학비료생산으로 ‘듬북조문’이 사라진 제주 해녀에게 ‘헛물애’는 ‘금물애’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복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라는 가사의 유행가는 이때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미역대조문’의 시대가 끝나고 ‘헛물애질’의 시대가 열린 것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변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1970년대의 일입니다.
2. 심방의 눈물
새 집을 지어 입주하거나 다른 집으로 이사할때 연행하는 굿을 성주풀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제주 굿 연구자 강정식의 글입니다.
“1980년 당시 제주시는 한창 외곽으로 시가지를 확장해가고 있었다..(중략)..이때 이 지역에 집을 새로 짓고 이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당연히 성주풀이가 어느 때보다도 성행하게 되었다.” <제주도 성주풀이>,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8p
다음은 구제주 시내 초등학교의 개교 시기입니다.
중앙초등학교(1972)
인화초등학교(1980)
삼성초등학교(1981)
도남초등학교(1983)
이는 1980년대 제주시의 인구유입과 증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1980년대 제주도의 기반산업은 농,어업이었지만, 제주시로 집중되는 도시화 현상은 육지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례 없는 사회적 변화는 새로운 문화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기존문화가 유지됩니다.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으면 기존문화는 퇴장하거나 보존되거나 변화합니다.
1980년대 제주의 대표적인 두 도시,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연행된 성주풀이의 횟수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이 현상은 80년대 말 갑자기 사라지고 맙니다.
다시 강정식의 글입니다.
“성주풀이는 과거에도 그다지 자주 벌어지는 의례는 아니었다. 이사나 신축이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참 사람들의 이주가 빈번해지고 도시가 확대되면서 이사와 신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가 있는데, 이 시기야말로 성주풀이가 성행하던 때이다. 그러나 점차 공동주택이 늘고 무속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성주풀이의 기회도 줄었다.”(<제주도 성주풀이>,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353p)
1980년대 제주의 성주풀이는 개인의 미래를 위한 축원의 연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주도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당시 성주풀이는 과거와 작별을 고하는 애도의 연행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도시의 광역화에 따른 마을 붕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이에 따라 마을에 기반한 제주 굿의 성격 또한 변화를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도시화라는 전대미문의 시기, 마을 굿의 오랜 전통과 작별을 고하는 자리에 성주풀이는 떠밀리듯 모든 굿을 대신하여 등장했고, 헌집과 새집 사이에서 두꺼비가 울어대듯, 제주도가 떠나갈듯 요란한 연물의 합창 속에서 정작 심방은 뜻모를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3. 미운 전복
문전본풀이는 성주풀이의 한 대목입니다. 집에 좌정한 여러 신들의 연원을 풀어내는 신화이기에 문전본풀이는 성주풀이의 여러 연행 중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전본풀이의 문제적 인물은 ‘노일제대귀일의 딸’입니다. 그녀는 남의 남편을 가로채고 본부인을 죽이고, 일곱 아들까지 죽이려 드는 악녀입니다. 하지만 막내 아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탈출하고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사체를 뜯어내어 바다에 던지는 대목이 나옵니다. 많은 이들이 바다생명 탄생신화로 해석하고 있는 그 장면을 한 번 읽어 볼까요?
일곱 형제가 달려들어 다시 복수하고자
두 다리를 뜯어 디딜팡을 만들고
머리는 끊어서 돗도고리를 만들고
머리털은 끊어 던져 버리니 저 바다의 ‘패’가 되고
입은 끊어 던져 버리니 ‘솔치’가 되고.
손톱 발톱은 끊어 던져 버리니 ‘쇠굼벗’, ‘돌굼벗’이 되고
배꼽은 끊어 던져 버리니 ‘굼벵이’가 되고
하문은 끊어 던져 버리니 ‘대전복’, ‘소전복’이 되고
육신은 독독 빻아서 바람에 날려 버리니 각다귀 모기가 되고...
하지만 바다생명 탄생 목록에 귀한 미역이 빠졌다는 것은 의아한 일입니다.
악녀의 사체에서 탄생한 것이 대체 어떤 것들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패’는 조간대 상층에서 자라는 흔한 해조류입니다.
부드러운 ‘넙패’는 먹지만, ‘패’는 뻣뻣해서 먹지 않습니다.
일제 말 공출로 굶주릴 때, ‘무릇’에 ‘패’를 넣어 여러 번 끓인 후에 엿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솔치’는 해녀가 물질할 때 반드시 피해야 하는 물고기입니다.
솔치에게 한 번 쏘이면 몸이 퉁퉁 붓고 심할 경우 마비가 오기 때문입니다.
‘굼벗’은 먹어볼 게 없을 뿐 아니라 일단 생긴 게 흉합니다.
‘굼벵이’는 ‘구재기’(뿔소라)를 말합니다.
‘구재기’는 일제 말기에 반짝 수요가 있었을 뿐 ‘헛물애질’의 대상입니다.
‘전복’도 ‘헛물애질’ 대상이지만 ‘구재기’와는 달리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래와 같지 않을까요.
-전복은 귀한 것이다.
-진상으로 바쳐야 하는 전복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전복은 미운 것이다.
(제주해녀가 조선왕실에 바쳤던 전복은 한 해 약 5만 마리였습니다.)
악녀의 사체에서 탄생한 것들은 모두 해녀의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것들 뿐입니다. 좋은 것에서 좋은 게 나오고, 나쁜 것에서 나쁜 게 나오는 것이 상식입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의 몸에서 귀한 미역이 나온다는 건 '굿'의 관객인 해녀의 입장에서 가당치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해녀에게 고통만 주는 전복의 탄생을 ‘디딜팡’(변소에서 발을 딛는 자리)과 ‘돗도고리’(돼지 먹이통)에 연결하여 해석해보면, 문전본풀이는 진상노역의 원흉인 왕을 조롱하기 위해 짜낸 교묘한 각본이 아닐까 하는 상상에 이르게 됩니다.
과거 제주의 시골 마을에서 집을 새로 짓는 일은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는 수눌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에게 축원 올리는 성주풀이는 그동안 고생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집 주인이 베풀어야하는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제주 백성은 1~2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귀한 축제의 끝자락에 왕에 대한 풍자를 은밀히 심어놓고 해방의 클라이막스를 즐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 늙은 쉐랜 촐 아니 먹나?
4.3추모제가 1989년 처음으로 봉행되었습니다. 87년 6월에 민주항쟁이 있었지만 군사정부의 서슬은 녹슬지 않았고, 4.3은 금기로 묶여 있던 시절이기에 모두가 구속을 각오하며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행사 일정에 안사인 심방의 ‘추모굿’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사 당일 안사인 심방은 사라지고 맙니다. (행사방해공작을 펴던 기관에서 안사인 심방을 납치하여 부산으로 강제 격리시켰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위기상황에 안사인 심방을 대신한 사람은 정공철이었습니다. 연극무대에서 심방을 연기하던 배우 정공철이 4.3의 한을 달래기 위해 진짜 심방이 된 것입니다. 추모굿이 끝난 후 관객도 울고, 유족도 울고, 서툰바치 심방 정공철도 울었습니다.
70년대 미역의 종말과, 80년대 마을 굿의 낙후를 초래한 근대화와 도시화가 정상궤도에 오른 후, 집권세력은 사회안정, 정의구현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적, 물리적 폭력을 반복하였습니다.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사회세력은 누적된 폭력에 저항하며 시대적 요청인 민주화를 견인해 나갑니다. 시대의 이행기에 탄생한 '민중'은 마을의 전통적 정체성과 도시의 역동적 변화 사이에서 동요했고, 그 긴장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주 예술인들은 그러한 고민의 도정 속에서 '마당굿'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1990년대 한국 문화계를 선도하게 됩니다.
'마당굿'의 산파는 '놀이패 한라산'이었습니다.
1989년 4.3을 최초로 극화한 <4월굿 한라산>을 무대에 올리며 4.3 정신 계승의 결의를 다진 '놀이패 한라산'은 1990년 <백조일손>, 2001년<애기동백꽃의 노래> 등, 매 년 창작공연을 갱신해 나가는 열정으로 4.3의 역사를 4.3의 예술로 완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당굿의 실천은 '놀이패 한라산'의 전신인 '극단 수눌음'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별초 대몽항쟁의 역사를 제주민중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1980년 <항파두리놀이>, 강제검의 임술민란을 다룬 1981년 <돌풀이>, 역사에 묻혀있던 제주해녀항일운동을 발굴하고, 현장에서 해녀들과 생활하며 대본을 완성한 1982년 <좀녀풀이>. 연이은 현실비판과 진보적 공연을 연출한 '극단 수눌음'은 결국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고, 1989년 4.3추모제를 전후로 다시 뭉친 이들이 '놀이패 한라산'입니다. 잃어버린 제주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복원해 내고, 매 공연마다 파문을 일으킨 '놀이패 한라산'의 역사는 말 그대로 제주 예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놀이패 한라산'의 중심에 정공철이 있었습니다. 물론 '놀이패 한라산'의 역사는 많은 예술인들의 땀과 눈물의 총화입니다. 다만 정공철에게 '민족광대', '민중심방'이라는 애칭의 영애가 돌아간 것은 근대화가 초래한 이원적 삶의 동요와 긴장과 갈등을 온 몸으로 버텨내며, 예술가의 시대적 소명을 앞장서 실천한 결과일 것입니다.
1998년 오사카에서 봉행된 4.3위령제에 참석한 정공철은 김윤수 심방과 함께 눈물의 4.3추모굿을 연행한 후, 2002년부터 진짜 심방으로서 무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술을 통해 4.3의 금기에 도전하던 배우 정공철이 심방 정공철이 되어 굿을 통해 4.3을 해원하게 된 것입니다. 2011년에는 무조신께 초역례를 바치는 신굿을 열고 마침내 무적부에 정공철이라는 이름 석자를 올렸지만, 얼마 가지 못해 큰 병을 얻게 된 정공철 심방은 2013년 6월 세상과 작별하면서 많은 이들의 눈물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맺힌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심방의 의무입니다. 웃음과 울음으로 해원해야 하는 심방에게 풍자와 해학은 굿의 정신입니다. 제주 굿은 조선시대, 일제시대, 4.3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해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억눌려 살아야 했던 제주백성에게 풍자와 해학은 억압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이며, 웃음과 울음이며 삶의 의지였기 때문입니다. 배우 정공철은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의 억압에 저항했고, 심방 정공철은 웃음과 울음으로 세상의 한을 풀어냈습니다. 연기 속에서 진실을, 진실 속에서 예술을 추구했던 인간 정공철. 그는 남의 한은 풀되 자신의 한은 풀지 못하는 전상 그르친 심방이 되어 삼시왕전 부름을 받고 저 하늘의 별이 된 것입니다.
정공철은 평생 데모 현장에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그를 감시하느라 미운정이 들어버린 한 형사가 "이젠 늙었으니 데모 좀 그만하라"고 핀잔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정공철 왈, "늙은 쉐랜 촐 아니 먹나?"(늙은 소라고 풀 아니 먹나?)
지난 6월은 정공철 심방 타계 10주기였습니다. 늦게나마 정공철 심방 영전에 추모의 념을 올립니다.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