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과 함덕 사이에 자리한 신흥리에는 ‘도둑개’라는 석방렴이 있습니다.(석방렴은 갯가에 돌을 쌓아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어로시설입니다.) 원래 이름은 ‘마농개’였는데 ‘도둑개’라는 별칭이 생긴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오래전, ‘마농개’에 멸치 떼가 가득 몰려들었습니다. 이른 아침, 멸치걸이의 기대를 품고 ‘마농개’로 나갔던 신흥리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마농개’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멸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밤에 누군가 와서 멸치를 싹쓸이하고 만 것입니다. 그 후부터 ‘마농개’가 ‘도둑개’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100여 년 전, 신흥리지 임자년(壬子年·1912년)의 기록입니다. 

“봄 3월에 동민들이 10명, 20명 씩 계(契)를 조직하여 해변 네 곳에 ‘개’를 쌓았다. 그런데 풍속과 인심이 다달이 변질되었다. ‘개’ 안에서 고기를 본 사람은 가까운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고 고기를 잡았다.” 

이렇듯 ‘개’는 마을의 공동 자산이며, ‘개’에 든 멸치도 공동의 것입니다. 하지만 조천리에는 그렇지 않은 ‘개’가 하나 있습니다. ‘시칩읫개’가 그것입니다. ‘조천 김씨’ 문중, ‘시’자 항렬 집안 소유의 ‘개’입니다. 그래서 ‘시’자 집안의 개, ‘시칩읫개’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시칩읫개를 모르면 조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노인분께서 ‘시칩읫개’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시칩 하르방’에게 혼구녕이 난 어릴 적 기억을 전해 주십니다. 다음은 현기영 선생의 소설, 《바람 타는 섬》의 한 대목입니다. 제주 근대사에서 ‘조천 김씨’ 문중이 차지했던 바를 잘 보여줍니다. 

“전 도민이 가담한 봉기인데도, 위군충정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민군에 대항하는 반동세력으로 등장하든지, 사세가 불리할 듯싶으면 철저히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 1901년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애당초 대정고을과 정의고을 두 유림 중심이 되어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었건만, 조천 김씨 문중은 시종 방관자로서 일관했다. 이러한 봉건적 대의명분이 그래도 한 번은 옳게 기염을 토한 적이 있으니, 그것이 기미년 3월의 만세 운동이다.”

‘새배’와 ‘엉장매코지’(79) 사이, 너른 갯가에 ‘시칩읫개’(77)가 있습니다. 조천에 석방렴이 여럿 있으나 ‘시칩읫개’는 그 중에서도 목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규모(빨간 원) 또한 조천 제일이기에 그 당시 ‘시칩’의 위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진=고승욱)
‘새배’와 ‘엉장매코지’(79) 사이, 너른 갯가에 ‘시칩읫개’(77)가 있습니다. 조천에 석방렴이 여럿 있으나 ‘시칩읫개’는 그 중에서도 목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규모(빨간 원) 또한 조천 제일이기에 그 당시 ‘시칩’의 위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진=고승욱)

조선시대의 조천은 제주 지방권력의 본산이었습니다. 조천 권력의 물적 토대는 군사 동원력까지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민란이 일어날 때마다 창의군(倡義軍)을 조직하여 관군 대신 민란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하여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 당시, 조천권력은 민중의 타도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천은 중앙의 정객과 유배객이 첫발을 내딛는 곳으로 한양과 제주를 잇는 경제, 문화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교류를 주도한 이들은 조천의 유림이었습니다. 구한말 조천 유림의 정신세계는 제주에 유배 온 ‘위정척사’ 최익현과 ‘동도서기’ 김윤식이라는 대립각 속에서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사상적 훈련은 향후 항일투쟁의 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3.1만세 운동 이후 조천 유림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분기되었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물론 이들 중에는 친일파도 있습니다.) 조천 유림의 중요한 축이었던 ‘조천 김씨’ 일가 중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인사가 8명이며, 여기에서 ‘시’자 항렬의 인사가 7명입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엘리트들은 친일을 하거나 항일을 했습니다. 친일은 핑계가 필요했고, 항일은 사상이 필요했습니다. 항일의 사상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였습니다. 제주의 항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궁금한 점은 당시 제주의 항일운동가들이 갖고 있었던 제주민란에 대한 생각입니다.

자신의 조부 혹은 아버지, 삼촌과 대결했던 제주민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어떠했으며, 그들의 사상 형성에 제주민란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만약 제주민란과 제주항일운동의 사상적 관련성이 입증된다면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와는 결이 다른 평등사상과 공화주의를 상상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제주민란의 정신을 무조건 평등사상과 공화주의로 등치시키는 건 무리입니다. 하지만 민란의 과정에서 너 나 없이 동지가 되어본다는 것만큼 강력한 평등의 경험이 또 있을까요? 조선말 연속된 세 차례의 민란은 공화(共和)를 개화(開花)시킬 평등의 싹을 제주인의 가슴에 심어 놓기에 충분하고도 강력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다만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자생적 민중 사상의 개화는 지연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서구의 공화 사상을 선취한 엘리트 중심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선도하게 됩니다.

4·3의 전사(前史)를 말할 때, 조선 말 제주민란이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항일운동이 그 뒤를 잇습니다. 하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이 두드러집니다. 민란은 자력으로 바꾸자는 것이지만, 항일은 차력으로 바꾸자, 즉 남의 것, 근대성을 배워서 극일(克日) 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민란과 항일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생적 사상의 존재와 그 지속적 영향력이 규명되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적합한 후보는 동학입니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이 좌절된 이후 동학은 여러 종교로 분기됩니다. 하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와 평등을 지향하는 민중주의가 결합한 ‘민족민중종교’로 발전한 동학사상은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의 일상적, 내면적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됩니다. 

이러한 동학의 흐름 속에서 제주민란과 제주항일의 연속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898년 방성칠 난입니다. 남학당(동학의 연합세력)의 일파인 방성칠은 제주로 이주한 후 민란을 조직하여 왕을 부정하고 별국(제주 독립국)을 선언합니다. 이는 봉건적 사유를 넘어선 혁명적 발상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왕조에 저항했던 동학의 잠재적 욕망의 표현이며, 평등사상의 예고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사건이기에 민족주의는 논외입니다.)

다음은 1918년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입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불교인, 선도교인, 민간인 700여명이 벌인 무장항일투쟁입니다. 선도교는 증산도의 분파입니다. 증산도는 잘 알다시피 동학의 개벽사상을 계승한 민족민중종교입니다.

명도암에 자리한 무극대도 성전은 무극대도 도주(道主) 강승태가 선화(仙化)하기 전 수년 동안 머물면서 저술과 포교활동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성전 종루에 작은 종이 달려 있습니다. 종에 ‘무극대도’라고 적혀있습니다. ‘포교 67년’이라 적힌 것으로 보아 2002년에 제작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건곤도인 일동’이라 적혀있습니다. 건도, 곤도는 남,녀 교인을 칭하는 말입니다. 교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진=고승욱)
명도암에 자리한 무극대도 성전은 무극대도 도주(道主) 강승태가 선화(仙化)하기 전 수년 동안 머물면서 저술과 포교활동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성전 종루에 작은 종이 달려 있습니다. 종에 ‘무극대도’라고 적혀있습니다. ‘포교 67년’이라 적힌 것으로 보아 2002년에 제작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건곤도인 일동’이라 적혀있습니다. 건도, 곤도는 남,녀 교인을 칭하는 말입니다. 교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진=고승욱)

마지막으로 1936년 무극대도의 항일운동입니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횡행하던 엄혹한 시절, 무극대도는 천황을 부정하고, 전쟁과 징병을 거부했습니다. 무극대도는 강승태가 제주의 보천교 교인들을 규합하여 만든 신생종교입니다. 보천교는 동학사상을 계승한 종교이자 일제 강점기 조선의 최대 종교였지만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맙니다. 동학과 보천교를 잇는 무극대도는 ‘끝없이 훌륭한 진리’라는 뜻으로,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지은 ‘용담가’의 문장,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에서 인용한 이름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무극대도의 발흥지가 동광리라는 사실입니다. 동광리는 강제검의 난과 방성칠의 난이 시작된 곳이며, 이재수의 난 당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제주민란의 중심지입니다. 동광리에서 무극사회를 일으키겠다는 무극대도의 선언은 제주민란의 저항정신을 이어받아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사상적 연속성’은 매우 허술한 논증입니다. 겨우 세 개의 사례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제시한 세 개의 사례는 사상적 연속성을 밝히는 논거라기보다는, 하나의 가설에 이르기 위해 놓인 징검다리로 이해해 주십시오. 

“민란, 항일, 4·3에 이르는 약 100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축적된 어떤 것이 제주민중의 내면에 있다.”라는 가설을 상정해 봅시다. 만약 저에게 그 가설을 풍경화로 그려 보라 한다면, 저는 그 풍경 속에 우뚝 솟은 산 하나를 그릴 겁니다. 그 산은 근대성이라는 외적 자극과 동학이라는 내적 반응이 서로 부딪히고 갈라지고, 엘리트와 민중의 각성과 실천이 때로 협력하고, 때로 경합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솟아오른 산입니다.

제가 이러한 가설의 풍경을 상정하는 이유는 75년 전 미 제국이 구축하려 했던 세계질서에 도전하기 위해, 지도에서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이 일으킨 4·3이라는 노도와 불꽃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4·3의 현재적 의미를 찾고 만들어 가는 크고 작은 실천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가설의 풍경은 확인된 과거의 기억으로 채워야 하는 인과의 풍경이지만, 또한 미래를 향해 열어가야 하는 목적과 실천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설의 풍경에 솟아있는 산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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