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딸 상콤이(태명)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던 필자는 오랜 고민과 계획 끝에 본가가 있는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보다 쾌적하고 좋은 환경은 삶의 질을 올려주었지만, 그에 따라 불편한 것들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눈에 띈 불편함들을 3회에 걸쳐 녹색발광을 통해 이야기 나눠보려합니다.”
남원리로 이사 온 지도 두 달이 넘어간다. 여전히 고향으로 복귀는 만족도가 높다. 최근에는 워낙 날씨가 궂어 별은 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늘 곁에 초록이 함께하고 귤꽃향이 넘실거리는 이곳이 참 좋다. 상콤이도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행복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쩍 명랑해진 딸과 함께 하는 남원 생활은 정말 즐겁다. 이런 즐거움과 별개로 그 사이 대중교통에 대한 소식은 답답하기만 하다. 지난 글에서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한 증차를 제언했는데 오영훈 지사는 감차를 얘기하고 있다. 대중교통 요금이 너무 비싸다고 얘기하는 와중에 민영화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어쩜 이렇게 전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정책이 나아가는지 어질어질하다. 도대체 제주에서 기후동행카드와 같은 저렴한 대중교통 정기권을, 읍면에서 대중교통으로 제주시나 서귀포시 도심지역에 출퇴근이 원활한 곳으로 만드는 날이 올는지 걱정이 앞선다.
여전히 뉴스에는 지역소멸이 거론된다. 제주지역 출생률은 0.83인데 가장 먼저 인구소멸이 찾아올 곳은 제주시보다는 서귀포시일 테고 그중에서도 읍면지역일 것이다. 앞서도 읍면에 청년층과 젊은 부부들이 거주하려면 읍면에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를 갖추고 제주시와 서귀포시 동 지역을 원활하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체계가 마련하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고 제언했다. 그런데 일단 대중교통에 대해서는 제주도의 의중이 영 마땅치 않다. 읍면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지역 균형 발전은 말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답답하다.
이런 대중교통에 대한 답답함을 뒤로하고 다른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남원으로 내려온 이유인 바로 돌봄의 문제 말이다. 필자에게 상콤이가 생기고 가장 큰 걱정은 돌봄이었다. 활동가의 빠듯한 삶에 맞벌이는 필수다. 둘이 같이 일을 하려면 돌봄은 너무나 중요한 키워드였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돌봄은 사실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어린이집에서 저녁까지 아이를 봐주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맞벌이를 인증하면 보통 7시 30분 정도까지 아이를 돌봐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어린이집에 머무르는 아이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 상콤이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아이였다. 어른도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면 힘든 것처럼 아이도 어린이집에 오래 머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오후 4시 30분부터 늦어도 6시 30분에는 하원을 한다. 필자가 제주시에 거주할 때 7시를 넘겨 집에 가는 아이는 우리 아이를 포함해 두 명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남는 아이는 상콤이였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도 피곤하고, 늦은 저녁을 먹이는 부모도 피곤하다. 늦어진 저녁만큼 가사를 돌보려면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더뎌진다. 게다가 부모는 아이가 이렇게 늦게까지 어린이집에서 지내는 것에 상당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결국 맞벌이를 포기하고 아이를 보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결국 부모 이외의 다른 가족의 조력이 없이는 맞벌이는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다.
그래서 가족의 조력을 받기 위해 필자는 남원리의 본가로 향하게 되었다. 늦은 저녁에 하원 하던 아이는 4시 30분에 하원 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각각 퇴근해서 오는 엄마, 아빠, 고모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낸다. 필자가 퇴근하는 시간은 늦어졌지만 대신 상콤이와 함께 하는 가족은 늘었고 가족과의 유대감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점점 명랑해지는 이유가 아마 이런 돌봄의 효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돌봄을 부모가 아닌 조부모의 조력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마뜩잖은 일임은 확실하다. 간단하게 나이 드신 조부모가 내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효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국가 차원의 돌봄에 대한 정책의 전환이 너무나 절실하다. 그런데 이런 정책의 전환이 희한하게 늦은 시간까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지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돌봄을 늦게까지 해주는 것에 대한 필요는 인정하더라도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 돌봄 시간에만 집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이 돌봄에 있어 사실 가장 중요한 정책은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결국 주 40시간 노동제를 단축하는 것은 물론, 아이 돌봄을 위해 육아휴직뿐만 아니라 육아 노동시간 단축을 더욱 활성화하고 나아가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돌봄은 대부분은 노동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이를 연결하기보단 현행 노동시간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것에 돌봄을 끼워 맞추려니 돌봄 시간을 늘리는 것에 정책이 몰입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필자도 아이를 위해 육아휴직도 못 써봤고, 육아기 단축노동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부모가 아이 돌봄을 위해 이런 제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
그렇게 출생률 저하가 걱정이고 지역소멸이 걱정이라면 부모와 아이가 함께할 시간을 충분히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니 당신의 노동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 더 많이 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유치원에 학교에 오랜 시간 맡겨두는 정책은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를 돌볼 시간, 가족으로서의 유대의 시간을 보장해 주는 것이 돌봄의 핵심 정책이 되어야 지금의 문제를 다소간 해결할 수 있다. 또한 그 시간만큼 소득을 보전해주는 적극적인 돌봄 지원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돌봄 정책은 효과가 부족하다는 도돌이표를 달게 될 테니 말이다.
필자는 상콤이 방에서 같이 잠을 잔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 깨서 엄마, 아빠를 찾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필자가 글을 쓰는 오늘, 출근을 준비하는 이른 새벽에 상콤이가 깨어나 아빠를 찾아 화장실에 있는 필자를 찾아왔다. “아빠가 없어졌어!”라며 울면서 찾아온 아이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실제 필자는 아이가 자는 시간에 대부분 출근한다. 1시간만 늦게 출근할 수 있어도 어린이집까지 걸어서 조잘조잘 얘기 나누며 아이를 데려다줄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러면 상콤이도 “아빠가 없어졌어!”며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울음으로 호소하는 일도 없을텐데 말이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본 부모가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아이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길 바라본다. 돌봄과 노동이 유연하게 조화롭게 결합하는 정책이 마련되길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