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들이 4.3과 평화, 인권 등 내용을 담아 직접 조문화한 제주평화인권헌장 초안이 마련됐다. 그러나 의견 수렴을 하는 자리에서 반대 측의 물리적 점거로 사실상 파행으로 끝났다.
제주도는 9일 오후 2시 제주혼디누림터 대회의실에서 제주평화인권헌장안에 대한 도민 의견 수렴을 위해 공청회를 개최했다. 올해 공개모집을 통해 선발된 100여명의 도민참여단이 토론을 통해 마련한 헌장의 초안을 공개하는 자리다.
민선 8기 제주도정은 제주평화인권헌장 제정을 도정 10대 핵심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도민참여형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도민참여단은 4월부터 5월까지 인권과 4.3, 헌장 체계 등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4차례의 원탁회의를 진행했다. 분과별로 10명씩 조를 이뤄 헌장에 담아야할 가치 및 권리, 도민이 바라는 헌장의 세부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분과별 헌장의 세부내용을 구체적으로 조문화했다.
△전문과 일반원칙 △4.3과 평화 △참여와 소통 △건강과 안전 △문화와 예술 △자연과 환경 △사회적 다양성 존중 △인간다운 생활 △평생학습사회와 교육인권 △이행과 실천 등 10개 분과로 나뉘었다.
헌장은 기관 및 단체 등에서 어떠한 사실에 대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정한 규범이다. 선언적 성격으로, 강제적 구속력은 없다. 다만, 헌장을 바탕으로 각종 법령 제정과 정책, 교육 등을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이미 도내 여러 기관에서 인권 관련 헌장을 내세우고 있고, 내용도 비슷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헌장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최소한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시민들이 직접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공청회는 인권 헌장안 마련에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이번 공청회에서 의견수렴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헌장 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 100여명의 반발 때문. 공청회 현장은 행사 시작 30여분 전부터 어수선했다.
이들은 피켓을 들고 "완전 무효", "제정 반대" 등 구호를 외치면서 행사 진행을 방해했다. 이들은 "헌장안에 포괄적차별금지법이 포함돼 있다"며 "소수자의 인권과 삶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수 인권이 역차별 받는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평화인권헌장 제정반대위원회' 대표라고 주장한 지모씨가 분위기를 이끌면서 구호 제창을 유도하면 객석에서 호응하는 식이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지씨는 4.3 76주기였던 지난 4월 3일 자신의 SNS에 "제주4.3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공산혁명으로 시작됐다"고 4.3을 왜곡하기도 한 인물이다.
공청회 시작 시간인 이날 오후 2시엔 결국 아수라장이 됐다. 도 관계자가 마이크를 잡고 행사를 진행하려 하자 반대 측에서 급기야 단상 위로 대거 난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만큼 공청회를 무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공청회를 위해 참석했던 시민단체 관계자, 시민 등도 "그만하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제주도 측은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결국 2시 40분께 공청회를 개회했다. 이에 반발한 반대 측은 더 많은 인원이 단상에 난입하기 시작했고,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난장판이 됐다.
경찰 50여명은 인간띠를 만들어 제지했으나, 물리적 충돌이 코 앞인 상황이었다. 결국 공청회는 10분만에 끝났다. 예정대로라면 헌장 제정 추진 상황 경과보고, 제주평화인권헌장안 주제 발표, 의견수렴 등으로 1시간 40분 소요될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제주도 관계자는 "이런 상황까지 올 지 예상을 못했다. 미리 배부한 의견서는 다수 확보한 상황"이라며 "다음날 서귀포시에서 이뤄지는 공청회는 예정대로 진행할 계획이다. 향후 의견수렴은 내부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귀포시 공청회는 다음날인 10일 오후 2시 서귀포시청 별관 문화강좌실에서 열린다. 다만, 이날과 마찬가지로 반대단체의 난입이 우려되고 있다.
한편, 제주도는 이번 공청회를 통해 수렴된 도민 의견을 검토해 헌장 최종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후 제정위원회의 헌장 확정 등의 절차를 거쳐 헌장을 완성하고, 오는 12월에 헌장 선포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