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투-인권왓 특별기획: 제주, ‘학생 인권보장의 섬’으로 도약하라-1

"제주도, 학생 인권보장 체제의 선진지 되어야"

(사진=픽사베이)

청소년 시절에 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수능이 끝나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금전이 궁했다기보다는 “학생일 때가 가장 좋을 때”라던 어른들의 격언이 내심 못마땅한 탓이 컸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학생(청소년)이 어른과 달리 모종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맥락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은 각종 사회적 책임이나 법률적 구속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야 했지만,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자유란 미성숙의 징표이자 어떤 의미에서 ‘무권리 상태’의 표현이었다. 당시 나는 ‘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돼’를 ‘네가 어떻게 일을 하냐’는 말과 본질상 동일한 의미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수렵과 채집활동으로 유지되던 사회에서는 소년이 사냥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어른됨을 증명하고자 했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능력을 인정받은 때로부터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선언은 내가 권리의 주체로 서겠다는 일종의 ‘어른 선언’이었다. 곧장 경제적 자립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용돈벌이 정도는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그 밑바탕이었다.

호기롭게 띄운 어른 선언과 달리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녹록지 않았다. 일단 일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많은 사업장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구인 공고를 보고 찾아간 어느 식당 사장은 “내가 예전에 어린애를 알바로 써봤는데 책임감이 없어서 다시는 안 쓰기로 했다”며 일자리는 대학에 간 이후에 알아보는 게 나을 거라고 조언했다.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는 아르바이트 현장

겨우 얻은 일자리는 집 근처 냉면집이었다. 냉면집 사장은 고등학생도 일만 잘하면 상관없다며 나를 채용했지만 근로계약서는 작성하지 않았다. 사장에게 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알바는 원래 근로계약서를 안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변에 물어보니 ‘어린애’한테는 근로계약서를 ‘안 써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애’의 노동은 그렇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니 나에게 보장된 권리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던 학교에서조차 대학 입시를 중심으로 한 각양각색의 요설들을 늘어놓았을 뿐 노동자의 권리는 무엇인지, 청소년의 노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보호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가 ‘법률상 동등한 계약 상대방’으로서 사장에게 전해들은 바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9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2시에 퇴근이라는 것과, 시간당 최저임금으로 5천원을 준다는 것이 전부였다. 2015년 당시 최저임금이 5,580원이었으니 최저에도 못미치는 임금으로 노동력을 거저 제공한 셈이다. 정해진 휴게시간도 없어서 손님이 적은 시간대에 적당히 눈치를 보며 쉬었던 기억이 난다. 점심식사로는 냉면이 제공됐는데 그나마도 식사 도중 손님이 오면 젓가락을 내려놓기 일쑤였다. 손님을 받고 오면 냉면은 퉁퉁 불어서 면이라기 보다는 떡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형돼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던 와중에 중 한 달쯤 지나 나는 돌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장은 이래저래 말을 돌렸지만 결국 나보다 나이가 많고 장기적으로 근속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으니 더이상 나를 고용할 이유가 없다는 취지였다. 추측컨대 다른 사람을 고용한 데에는 ‘어린 것’의 노동 능력에 대한 불신과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된 해고로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고작 한 달짜리 노동 경험이 내게 준 교훈은 컸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덕분이다. 대학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또 근로기준법 제69조에 따르면 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근로시간은 1일 7시간, 1주일 35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만약 이를 어길 시 동법 제110조 제1호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의 규정으로 청소년 노동자가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근로시간의 제한도 마땅히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청소년 노동은 단순히 근로시간에 대한 규제의 미비로 불안정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청소년 26%가 경제활동 참여...노동권 침해 비율 높아

청소년 노동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보편적인 임금노동자의 열악한 처우가 청소년이라는 특수한 지위와 결합하면서 한층 착취적인 성격을 띤다. 2020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청소년 노동인권 상황 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을 기준으로 청소년 경제활동 인구는 전체 청소년(15세~24세)의 26.2%였다. 그러나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청소년은 이 중 42.5%에 불과했다. 또한 부당한 근로계약 체결(27.1%), 임금체불(23.6%), 최저임금 미준수(30.6%), 근로시간 초과 강요(35.3%), 휴게시간 없음(45.8%), 계약해지 강요(20.7%) 등 각종의 노동인권 침해를 호소한 비중도 적지 않았다.

‘학교 밖 청소년’의 경우에는 계약에 위배되는 초과근무 강요, 약정된 임금 미지급, 초과수당 미지급 등 부당한 처우를 겪었다는 응답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청소년 노동자 10명 중 4명은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한다는 점이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연차유급휴가 및 생리휴가 지급, 연장‧휴일‧야간 시 가산수당 지급, 해고의 제한 등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항이 의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지난 2019년을 기준으로 제주지역 노동자의 82%가 5인 미만 사업장에 고용되어 있는데, 제주지역 청소년 노동자들의 분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날 참석한 도민들이 고 이민호 군을 기리며, 현장실습의 진정한 변화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제주투데이
현장실습 중 사망한 고 이민호 군을 추모하며 현장실습 제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민들(사진=제주투데이 DB)

정리하자면 청소년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별이 합법인 상황에서 차별을 마다할 고용주는 없다. 청소년 노동자,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청소년 노동자들은 노동인권 보장의 차별지대에 놓여있다. 이러한 청소년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는, 청소년들이 말 그대로 ‘일에 목숨을 걸어야만’ 일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잔인한 현실과도 연결된다.

그럼에도 지난 2016년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중 달려오는 전철에 치인 19살의 구의역 김군, 그 이듬해 특성화고 현장실습 도중 사망한 고 이민호 군의 사례처럼, 일하다 죽는 것이 청소년 노동자가 ‘미성숙’을 이유로 감내해야 할 부분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층이 ‘노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2016년 경향신문이 서울지역 초등학생 1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학생 69명(62.7%)은 노동을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했다. 이 중 절반은 노동을 ‘힘듦‧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밖에 ‘노예/천민’, ‘공사장’, ‘공장’, ‘하기 싫다’ 등의 답변이 뒤를 이었다. 이는 노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반영한 것일까? 그런 점도 있겠지만, 필자는 아이들조차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기초하고 있음을 초보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현 시대의 노동이 고통과 착취를 동반하는 탓에, 그것이 노동의 기본적인 성격이라는 오해가 따른다. 노동이 멸시되고 주식·부동산으로 획득한 불로소득이 칭송받으며 재벌 총수가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하는 사회와 노동이 존중되고 노동자가 생산의 주인인 사회의 노동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

청소년 인권교육, 노동권 교육도 포함해야

그런 점에서 필자는 청소년 노동인권을 보장하는 방법이 크게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으로 나뉘어진다고 본다. 법률이 보장하는 노동3권을 교육하는 것은 당면한 노동현장에서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이다. 반면 ‘노동’ 자체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하는 것, 즉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 노동자가 주인인 사회의 노동의 차이점을 알고, 노동자들이 후자를 목표로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노동권 보장의 적극적 측면이다.

허나 대개의 노동인권 교육은 소극적 측면을 강조하는 데 그치고 있다. 노동인권 교육은 기존 제도를 노동자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는 방법과 더불어, 그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여야만 장기적으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어릴 적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노동을 ‘용돈벌이’로 가벼이 여겼던 나는 어쩌면 미성숙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감수했던 착취적 노동이 한때의 추억이나 ‘사회생활 경험’으로 치부되는 사회는 청소년 노동자는 물론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해로운 사회다.

최소한 청소년기부터 노동권의 내용이 무엇인지, 사용자로부터 노동권이 침해당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해야 한다. 최소한을 넘어서면, 노동의 의미와 목적을 노동자들의 입장에 맞게 재구성하고, 그 착취적 성격을 해소할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작업도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미성숙’하다고 여겨지는 청소년들에게 보내야 할 우리 사회의 성숙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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