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뒤 4·3희생자추념식 무대는 어떤 말들로 채워질까.
지난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77주년 4·3희생자추념식을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매년 4월 3일이면 4·3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열리던 ‘제사’(위령제)가 ‘정부 주최 행사’로 바뀐 뒤 무대 위 프로그램 구성은 정형화됐다. 주요 정치 인사들의 인사말, 유족 사연, 노래 공연, 특별 영상 상영 등으로 채워진다. 국가추념식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지난 2014년부터 이 짜임새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위무하는 행사의 주최자가 가해자라는 구도를 가진 추념식에서 공식적으로 허용된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유감’과 ‘슬픔’이다. 행사를 구성하는 프로그램도 이 감정을 바탕으로 연출되고 기획된다.
하지만 12·3 내란사태로 인한 국가적 혼란 속에서 거행된 올해 추념식 행사장에는 기존과 다른 욕망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등장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추념사에는 ‘용서’라는 단어가, 우원식 국회의장의 추념사에는 ‘공정’, 오영훈 제주도지사의 추념사에는 ‘우주산업’, 4·3 희생자유족회장의 추념사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등의 단어가 포함됐다.
이렇듯 4·3 추념 공간에서 (‘유감’ 또는 ‘슬픔’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다양한 욕망들이 자리하게 된 데에는 대통령 파면 선고 직전, 경기 침체, 조기 대선 국면, ‘4·3’의 확장 기회 등 2025년 4월3일의 의미를 단순히 4·3 희생자추념일로만 여길 수 없는 여러 환경 요인이 있기 때문일 테다.
자신이 따르던 상급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동시에 자신을 향한 비판 여론을 피해가려는 욕망이, 내년 선거에서 자신의 재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욕망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욕망들이 읽힌다.
다시 말해 ‘4·3’이 (이전과 달리) 말하는 저마다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품을 수 있는 기표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3’의 의미가 해가 거듭할수록 당대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환경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변화할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10년, 20년 뒤에 열릴 추념식은 그 구성 또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행사 주최 측도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고는 있다. 내용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지난해 추념식에서는 AI 기술을 이용해 제작한 영상을 상영한 바 있다.) 주요 프로그램인 ‘유족 사연’의 경우, 희생자를 기억하는 유족이 무대 위에 오르고 있다. 100주년 추념식에서도 지금과 같은 연출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4·3희생자를 기억하는 세대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 4·3추념식은 어떤 형식과 내용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
4·3 주요 과제 중 하나로 흔히 이야기되는 ‘4·3정신의 계승’이라는 구호에 대해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오늘날 4·3추념식에서 어떤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이뤄졌다고 보이진 않는다. 4·3추념식을 떠올려 보라. 동백꽃 배지를 달고서 행사를 지켜보고, 주요 정치인들의 참석을 요구하고, 제주 전역에 사이렌이 울려 퍼질 때 묵념을 하고, 4·3의 제도적 과제 추진을 호소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홀로코스트 기억 연구자인 마리안느 허쉬(Marianne Hirsch)는 집단 트라우마적 사건 생존자로부터 그 경험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세대, 이른바 ‘경첩 세대(hinge generation)’의 역할을 강조한다. 과거 폭력과 관련한 트라우마와 기억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3 생존자와 만날 수 없는 이들에게 그 기억을 어떻게 전달하고, 다른 시공간의 폭력의 기억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질문이다. 지금 당장 이 고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4·3’은 박제된 채로 연대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 머지않은 날 4·3추념식에서 ‘4·3’이 정치적인 필요에 따른 수식어로만 쓰이는 광경을 보게 되지 않을지 우려된다. 4·3의 정신이라고 홍보되는 ‘평화’와 ‘인권’, ‘상생’ 등을 추상적인 구호로 놔둔 채, 구체적인 실천으로 채워 넣지 못한다면 말이다. 100주년 4·3추념식에서는 어떤 감정들이, 어떤 의미들이 무대에 올라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