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이름만 불러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살아있을 때 어른들 욕심으로 아파하고 쓰러지는 아이들을 살리려고 애를 썼던 사람. 남북이 갈라진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일에 힘을 썼던 사람. 그는 1980년 초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를 썼다.
1951년 1월 북녘에 살던 아홉 살이 된 아이 ‘곰이’는 한국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오다 비행기에서 퍼붓는 폭격으로 죽었다. 그 해 북녘 군인 아저씨 ‘오푼돌이’도 압록강까지 후퇴했던 부대가 중공군 도움으로 다시 서울로 내려오다가 온 산이 흰 눈으로 뒤덮인 일월 그믐께 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죽었다. 그들 몸은 죽었지만, 한 맺힌 혼은 30년이 지난 뒤에도 강원도 치악산 골짜기를 떠돌고 있다.
곰이는 아직도 북녘에 살아 계실지 모르는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고, 오푼돌이 아저씨는 대동강에서 헤엄치고 놀던 때를 그리워한다. 한국전쟁으로 수백 만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보다 더 많은 목숨붙이들이 죽고 마을이 파괴되었다. 그들은 왜 죽었나. 한 많은 영혼들은 어느 하늘에서 떠도나.
지금은 2023년이다. 휴전을 한 지 70년이 지났다. 종전선언을 하지 않아 아직도 전쟁 중이다. 앞으로는 남북이 서로 죽이는 싸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한국전쟁으로 죽어간 영혼들은 피맺힌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다. 왜 남과 북이 서로 총을 겨누고 싸웠냐고. 왜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서로 죽이는 꼭두각시 피 싸움을 했냐고.
권정생은 돌아가시면서 피를 토하듯 말했다. 제발 더 이상 사람뿐 아니라 목숨 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권정생 유언장 일부
(...)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남북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권정생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남과 북에 사는 백성들이 서로를 미워하지 말고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길을 걷자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빌붙어사는, 돈에 눈이 멀고 무기를 마구 만들어 싸움을 하려는 사람들 말을 따르지 말자고. 내 목숨을 살자고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죽이는 싸움터에 우리나라 군대를 보내지 말자고.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에 나오는 옛이야기를 보면, 호랑이는 엄마를 잡아먹고 오누이마저 잡아먹으려 한다. 오누이는 힘을 모아 호랑이를 물리치지 않고 서로가 옳다고 다투다가 둘 다 죽는다. 이것이 남과 북이 처한 현실이다. 조선은 1945년에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이 됐지만 순전히 조선 사람 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 군홧발 아래 이루어졌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꿈은 조각조각 부서졌다. 돈에 눈이 멀고, 이념을 앞세운 사람들 손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남북이 갈라진 아픔을 70년 넘게 겪고 있다. 권정생은 곰같이 뚝심 있고 맑은 ‘곰이’와 조국 허리가 잘린 반쪽이인 ‘오푼돌이’를 그리며 남북이 다시는 총부리를 겨누는 싸움을 하지 말자고, 그런 싸움을 하지 않도록 마음 밭에 평화 씨앗을 뿌리자고 울부짖는다.
누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미국이 만든 무기를 사들여 군사 힘을 키우려는 남녘 통치자들이 들을까. 핵무기를 만들어 더 큰 싸움을 일으키려는 북녘 권력자들이 들을까. 아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지만 고향 집 냇물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 하늘 뜻을 따라서 먹을거리를 거두는 농사꾼들이 들어야 한다. 내 목숨이 귀하면 다른 이 목숨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길에 나서야 한다.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 하늘나라에 있는 권정생 할아버지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핀다.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영혼도 하늘나라에서 편하게 쉰다. 이 책 그림은 어둡다. 잿빛과 갈색, 흙빛이다. 얼굴도 슬프고 어둡다. 남북이 하나 되는 날엔 맑고 환한 빛으로 가득하리라. 그 날이 꼭 오기를 빈다.
글쓴이 은종복 씨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제주풀무질'의 일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책과 사회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또밖또북] 코너로 매달 마지막 주에 독자들과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