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면은 ‘아다마(頭·머리)노 조텡(朝天·조천)’이라 칭하여 조선 사상계의 거물 김명식을 비롯해 수많은 주의자(主義者)가 배출되었다. 1919년 조선독립만세 소요사건에 있어서도 조천이 발단되어 점차 제주 전도에 만연하였다.”
-1942년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에서
일제 강점 말기인 1937년부터 조천리 주민들은 신좌소비조합을 중심으로 한 항일 반전사상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전시체제 아래에서 모든 항일운동이 지하로 숨어들던 시기에 1919년 조천만세운동의 주역인 김시범을 비롯해 안세훈·김유환·김시용 등은 주눅 들지 않고 항일운동을 벌였다.
부생종과 김문준·김순탁 등 고인이 된 항일운동 전사들의 비석을 세우고 추도식을 열었다. 소비조합을 근거지로 해서 조천학술강습회 설립, 리민회(里民會) 개최, 전쟁 헌금 및 공출 반대와 같은 반전 투쟁 등 항일 대중투쟁을 전개했다.
항일운동 이끈 조천 사상가들
김시범(1890년생)과 안세훈(1893년생)은 조천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김시범은 조천만세운동으로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귀향하자마자 같이 검거된 동지 14명을 규합하여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했다. 만세운동 장소 ‘미밋동산에 모인 동지들’이란 뜻의 항일조직이었다.
동미회는 첫 과업으로 형무소에서 옥사한 동지 백응선의 묘비를 건립했다. 비문은 김시범이 썼는데, 일제의 연호가 아닌 단군기원 연호를 쓴 점이 눈에 띈다. 이처럼 김시범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배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굴욕의 시대를 이겨냈다.
안세훈은 어린 시절 집안의 어른인 유학자 안병택이 거처하던 전라남도 광산군에 가서 한학을 배웠지만 본인 스스로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우친 선각자였다. 조천만세운동 당시 시위에 대거 참여한 신명사숙(개량서당) 생도들의 교사로 재직하며 시위 현장에 동참했다. 조천만세운동 이후 1923년에 조천청년노동야학의 교사와 조천노동단의 발기인으로, 1924년에 제주산업연구회의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북녘땅 간도로 건너가서 항일단체에 가담해 적극적인 항일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12월 16일에 전간도조선인단체 대표회의에 간민교육연구회의 대표로 참석했으며, 1930년 10월 간도에서 열린 조선인 원로회의에 참석했다가 중국 관헌에게 검속되기도 했다. (1931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주요도시 순회좌담 간도편에서 안세훈이 자치촉회(自治促會) 대표로 참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 관문, 항일운동의 요람 되다
안세훈은 간도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조천으로 돌아와서도 후배들과 함께 항일 활동에 투신했다. 서울과 일본으로 진출해서 항일 의지를 펼쳤던 동년배 운동가로는 김시범 뿐만 아니라 김명식(1891년생), 고순흠(1893년생), 김문준(1893년생) 등이 있다. 이들 모두 당대 조천은 물론, 제주지역의 정신적 상징이자 지주였다. 조천이 지역과 이념, 여성을 대표하며 제주도 항일운동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이다.
이런 사실은 판결문에서도 드러난다. 1942년 8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신좌(조천)소비조합 항일운동 관련 재판이 열렸다. 여기서 제주도경찰서에서 근무하던 한 일본인 순사는 “조천면은 ‘아다마(頭)노 조텡(朝天)’(의역하면 머리로는 조천)이라 칭하여 조선 사상계의 거물 김명식을 비롯해 수많은 주의자(主義者)가 배출되었고, 1919년 조선독립만세 소요사건에 있어서도 조천이 발단되어 점차 제주 전도에 만연하였다”고 진술한다.
조천면이 ‘머리’라 불릴 정도로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배가 드나드는 항이 있다는 입지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조천은 조선시대 이래 제주도의 관문으로서 선진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23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천리는 상업이 발달된 고로 제주의 개성(開城)이라고 말하며, 사업으로나 문화 발전으로나 무엇으로든지 제주도에서 둘째가는 곳이며 이곳 상인들은 자본금도 많이 가졌을 뿐 아니라 상업에 대하여 활동이 민활하므로 경제에 침략적 수단이 풍부하다는 일본사람과 중국사람들이 들어왔다가 파산 선고를 받고 간 사람이 많으므로 일본사람들 중에는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쓰고 있다.
이런 경제적·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조천의 청년 엘리트들은 자기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제주읍내 교육기관으로 진학하였고, 나아가 일본 또는 서울 유학을 통해 근대 민족의식을 배양해 나갔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조천의 항일 전통은 해방 후 면면히 계승되어 나갔다. 아쉽게도 김명식, 김문준, 김시용 등 유명한 항일운동가들은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일제의 탄압 속에 유명을 달리했다.
역량과 경륜을 갖춘 항일운동가로서 살아남은 이는 김시범과 안세훈이었다. 자연스레 이들은 조천 주민들에 의해 지역의 상징성을 갖는 대표로 추대되었다. 김시범은 조천면의 초대 면장으로, 안세훈은 초대 조천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의 명망은 조천면에 그치지 않고 제주 전역으로 널리 알려졌다.
‘제주도의 모스크바’로 낙인찍히다
안세훈은 1947년 초 오대진(모슬포 출신)의 뒤를 이어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직에 추대되었다. 안세훈은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 실시 때 초대 도지사로 추천되기도 했다. 김시범은 1947년 초 제주도 민전이 결성될 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의 후배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김유환, 김평원, 김은환, 김의봉, 김시탁, 조규창, 윤창석, 김원근, 김완배, 김의봉 등이 해방정국에서 각종 청년 사회단체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조천리 출신의 김이환(항일운동가 김시학의 딸, 조천만세운동 주도자 김장환의 누이)은 제주도 부녀동맹 위원장을 맡았으며, 조천면 여성동맹 부위원장은 김옥희(김시범의 딸)였다.
조천면 항일운동의 주역들은 1947년 3·1절 기념집회와 3·10총파업을 거치면서 역사의 격랑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과 내륙지방으로 피신했지만, 제주 땅을 지키고 이 시국을 버텨냈던 조천 항일운동가들 중에 목숨을 건진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조천 지역을 ‘제주도의 모스크바’로 낙인찍었다. 3·10총파업 이후 4·3봉기 저항의 역사는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반역의 표징이 되어 버렸다. 19세기 이후 제주 근현대사의 주역으로 시대 전환을 이루어내며 자랑스럽게 등장했던 조천 사람들은 한동안 그늘 속에 가려진 채 ‘또 다른 새로운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전문가와 한뼘 더 들어가기
※묘비 없는 혁명가의 무덤을 바라보며
안세훈(일명 안요검, 죽산안씨 대동보에는 검훈, 1893~1953)은 조천읍 조천리 2931번지가 고향이고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과 교유한 유학자 부해 안병택과는 친척이 된다. 1901년부터 1911년까지 조천리 및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16년 조천의 신명사숙에서 김순탁, 박두규와 함께 민족정기를 고양시키는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19년 조천 만세운동의 상황을 보면서 혁명가의 진로를 넓혀 나갔다고 한다.
1923년 11월 8일 청년운동단체인 조천노동단을 발기인으로 조직하여 ‘자래의 인습적인 유의도식의 악습을 근본적으로 타파하는 동시에 공언보다는 실행적으로 압압히 마튼 일을 근기있게 기운차게 실행의 길을 밝히는 일’을 강령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1926년 6월 만주 땅 간도로 건너가 ‘간도 간민교육 연구회’ 상무 서기로, 동북 삼성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활동하다가 조천으로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5년경부터 김시용, 김유환과 더불어 항일 소비조합운동을 같이하게 된다.
신좌소비조합은 1927년 조천리 청년 20여 명에 의해 ‘실비로 물품을 판매하여 리민의 경제적 편의를 도모’하고자 조직되었는데,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1937년부터는 신좌소비조합이 김시용, 김유환, 안세훈 등에 의해 사회주의 외곽단체로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부생종의 비석 건립, 김문준의 추도식 거행, 김순탁의 추도식 및 비문 건립 운동, 중일전쟁에 대한 반전투쟁, 조천공립심상학교 증축문제 등을 벌이다가 1942년 김시용, 김유환, 김평원 등과 검거되어 안세훈은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또한 조천 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4년 형을 선고받았던 김운배가 사망(1934년)하자, 1938년에 묘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1945년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 강당에서 제주도 읍·면 대표 100여 명이 모여서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가 출범하였고, 1945년 9월 22일 제주도건준이 행정조직을 표방한 제주도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대의원들이 제주도사로 안세훈을 선출하였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의 민가에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20여 명이 참석하여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한 후, 1947년 2월 12일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리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결성대회에서 안세훈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1947년 2월 17일 오후 2시부터 5시 반경 사이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사 다수가 제주읍내 김두훈씨 집에서 회집하여 28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 혁명운동기념일을 전도적으로 의미깊게 성대히 거행하기 위해 3·1 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안세훈을 추대하였다.
1947년 2월 23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열린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가 조일구락부에서 열렸는데, 도내 읍면 대의원 및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과 방청객 200여 명의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안세훈은 ‘세계민주주의 체계에 입각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은 민주과업을 진정하게 실천하게 되는 고로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전 산하에서 최후까지 3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된다’는 개회사를 하였으며,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렸는데, 대회장 안세훈은 3·1 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연설하였다. 이어 ‘3·1절 발포사건’이 관덕정 앞에서 발생한다.
이에 1947년 3월 5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간부들이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의 집에 모여 ‘제주도 3·1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3월 9일에 제주읍 일도리 김두훈 집에서 사회인사 수십 명이 모여 ‘제주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3월 10일부터 경찰의 3·1 발포와 그 대응에 항의하는 성격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된다.
1947년 10월 6일 제주지방심리원은 안세훈에게 3·1 기념제주도대회의 불법성에 대해 ‘3·1 기념식은 당시 제주감찰청장의 허가를 수한 것으로 인정하고 무죄를 언도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1948년 1월 남로당제주도위원회에 대한 이른바 1·22 검거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 안세훈도 검거되었다가 풀려난다.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제주도 대표로 참가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원산시 인민위원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시기 월남하여 전남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에서 안인훈씨가 운영하는 약방에 은거하다가 1953년 4월 15일 병사하였다. 4·19혁명 이후 친척들에 의해 유해를 제주도로 모시게 되는데, 조천리 비석거리에서 성대하게 추모제를 지내고 대흘리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송시우 노동자역사한내제주위원장
<참고문헌>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도서출판 각, 2018.
김관후, 『4·3과 인물』, 제주문화원, 2018.
김찬흡, 『제주향토문화사전』, 금성문화사, 2014.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조천읍 역사문화지』, 2011.
제주도, 『제주도지』 제2권, 2006.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증언으로 듣는 안세훈의 마지막 여정
영상 촬영 및 편집=양동규·김호훈
‘3·10총파업 조사팀’은 지난 5월17일 안세훈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증언자를 만날 수 있었다. 광주에 사는 안성모씨(80)는 안세훈과 먼 친척이다. 안씨에 따르면 안세훈은 젊은 시절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사는 안병택(안씨의 증조부)으로부터 한문과 성리학 등을 공부했다.
1916년부터는 제주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김달삼 등과 함께 제주도 대표로 참가한다. 이후 한국전쟁 시기 월남해 찾은 곳이 한문을 배웠던 안병택의 손자이자 안씨의 아버지인 안인훈이었다.
“아마 인천상륙작전이 됐을 시기예요. 제가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모르는 분이 집에 오셨더라고요. 아버지가 ‘삼촌 되신다’라고 안세훈을 소개했어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어디 가서 하지 말아라’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요.”
안씨는 “안세훈 선생이 자기를 아저씨라 부르라 했다. 제가 어리고 그러니까 예뻐하셨다”며 “‘어려서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 다른 거 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오늘날 말하는 사상적인 이야기 같은 말을 들어보진 못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안세훈 옆엔 비서처럼 동행한 이가 있었다. 안씨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조규창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수십년이 흘렀지만 하도 잘생겨서 지금도 그 얼굴이 떠오른다”고 기억했다.
안세훈과 조규창이 은신하며 지낸 곳은 전남 광산에서 안인훈이 운영하던 약방에 딸린 방이었다. 약방이 당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사거리에 위치해 있어 안세훈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 밖으로 통 나가질 않았다고 한다.
안씨는 “아무래도 밖에 나가면 행여나 예전에 글공부를 같이 했던 분들을 만날까 하는 우려를 하지 않았겠느냐”며 “항상 한쪽 방에 앉아서 신문이나 책을 보고 밖에 못 나가고 그랬다”고 떠올렸다.
이어 “사람이 운동을 하거나 걸어야 건강해지는데 (안세훈은)그러질 못하고 햇볕도 못 쬐고 하니까 기력이 쇠약해서 결국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며 “약방에서 북쪽 방향으로 700미터 정도 가면 있는 야산에 시신을 묻었다. 묘비를 세우면 사람들이 ‘누구 묘냐’며 관심을 가질까봐 검소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조규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해선 “나이도 젊고 활발하니까 밖으로 잘 다녔다”며 “그런데 모시던 분이 돌아가시니까 누님이 있는 일본으로 가려고 했다. 아마 부산을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에 일본으로 갔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안세훈의 시신이 제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을 때였다. 안씨는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 유족이 유골을 수습해 간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조천으로 이장한 안세훈의 묘를 떠올리며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서 그래도 제주도를 위하고 제주도민을 위했던 훌륭한 분이었는데 마지막에 초라하게 묻힌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리=조수진 기자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가나다순)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