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에 나선 주민들은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하는 노래를 부르며, ‘왓싸, 왓싸’하며 마을을 돌았습니다. 우도파견소 경찰관들은 주민들의 위세에 눌려 꼼짝도 못했습니다.”
-<4·3은 말한다>중에서
제주도 우도지역(당시 구좌면 연평리) 유래 상 최대 규모로 진행된 시위. 1947년 3월14일 주민 1000여명이 우도 일대에서 “왓싸, 왓싸”를 외치며 행진을 벌였다. 당시 우도에 거주하던 주민 2000여명 중 절반 가까이가 참가한 집회였다.
동포 죽음 외면 못한 민중
당시 제주 섬 전역에서 그러했듯 3·1발포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주민들이 모인 것. 제주도 동쪽 작은 섬에서도 공권력의 과잉 진압에 목숨을 잃은 동포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앞서 3·1기념행사는 포구가 있는 하우목동에서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발포사건 이후 3월11일 연평국민학교에서 총파업에 참여하는 파업단이 조직됐다. 사흘 뒤 14일 오전 연평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주민 300여명이 참석한 집회가 열린 가운데 ‘3·1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장엔 초대 연평리장이었던 차두옥이 선출됐으며 부위원장은 이천근, 총무부장 양성화, 문체부장 고춘주 등이 맡았다.(‘3·1사건 체계도’)
대책위는 군중에 가해진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뒤 주민 1000여명이 함께 한 시위행진을 이끌었다. 3·1기념행사와 집회를 주도한 인물은 고성화 연평리 조선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 위원장이었다.
“삐라를 돌려달라” 우도경찰파견소 습격 사건
이날 시위가 끝나고 민청과 경찰 간 충돌이 일어났다. 전날인 13일 민청원들이 배포했던 ‘삐라’(전단지)를 경찰관들이 압수했기 때문이다. 민청 간부들은 경찰관을 찾아가 삐라를 돌려달라고 항의해 받아냈다. 또 돌아가는 길에 경찰관파견소를 찾아 간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파견소엔 경찰관 3명이 있었지만 이날 있었던 1000여명의 시위행렬을 본 터라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청원이나 경찰, 양쪽 모두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 경찰 측에 뒤늦게 알려져 열흘이 넘게 지나서야 우도에 응원경찰대 15명이 파견됐다.
<제주신보>에 따르면 “우도 도민들이 (경찰)파견소 간판·게시판을 파괴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하는데 동도(우도)와 본도(제주도) 사이에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26일에 소식이 전해져 즉시 응원경찰대 15명을 파견하였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우도에 파견된 응원경찰대는 민청 간부들을 검거하려 했지만 주도했던 간부들은 사건 직후 섬을 떠난 뒤였다. 시위를 이끌었던 고성화 위원장은 오화국과 함께 부산으로 피신했다. 나머지 관련 혐의자들이 몇몇 붙잡히긴 했지만 우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훈방 조치만 이뤄졌다.
하지만 우도지서 습격 사건으로 인해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됐던 차두옥 위원장은 1949년 1월 국경일에 조금 찢어진 국기를 달았다는 이유로 연행, 우도지서에 수감됐다. 일주일 정도 후 지서 주임 부영빈에 의해 고문치사 당했다.
차두옥 위령비에 적힌 글에 따르면 4·3 당시 민청 간부들이 육지로 피신하자, 우도지서에 주둔하던 서북청년단이 차두옥 선생에게 그 책임을 물어 문초했다고 한다. 민청 단원들을 보호하려 했던 차두옥 선생은 고문을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높은 교육열과 항쟁의 경험
우도주민들이 부당한 공권력에 적극 맞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높은 교육열과 함께 민중들이 주체로서 권력에 대응해 투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구가 가까이 있어 뭍지방과 일본에 드나들기 쉬웠던 제주 동부지역 조천면과 구좌면이 교육열기가 높았던 것처럼 우도도 마찬가지였다. ‘구좌면지’에 따르면 1918년 상우목동에 ‘영명서당(永明書堂)’이 설립됐다.
이 서당은 1938년 4년제인 ‘사립연평심상(演坪尋常)소학교’로, 1942년 6년제인 ‘사립연평소학교’로 바뀌었다. 이 학교의 교사와 졸업생 중심으로 민족해방 운동이자 초계층적 운동으로 평가 받는 ‘제주해녀항쟁’을 이끌기도 했다.
일제경찰이 해녀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검거한 청년 중엔 우도 출신이 11명이었다. 옥살이까지 한 우도 청년은 혁우동맹을 조직한 신재홍과 혁우동맹원 강관순, 김성오 등이다.
경찰이 청년들을 연행하려 할 때 우도 해녀 800여명이 이를 막아, 당황한 경찰대가 위협 사격을 하며 간신히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전문가와 한뼘 더 들어가기
※저항의 섬, 우도 그리고 고성화
1947년 3.1절 기념집회의 열기는 ‘섬 속의 섬’ 우도에서도 뜨거웠다. 연평리 하우목동 인근 밭에서 열린 당시 집회에는 연평리민 300여명이 참석했다. 당시 시위를 주최한 것은 연평리 민청 소속이었던 고성화 등이었다. 삼일절 발포 사건 소식이 전해지자 3월 14일에는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다.
당시 우도 인구는 2000여명으로 집회 참가 인원은 절반 가까운 1000여명이었다. 이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우도에서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도에서 이러한 대규모 항의 집회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배경에는 1932년 해녀 항일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 경찰은 해녀 항일 투쟁의 배후로 우도 출신 신재홍, 강관순 등을 체포했다. 신재홍과 강관순은 우도 지역뿐만 아니라 제주 일대에서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신재홍은 제주 야체이카 남원, 표선, 성산, 구좌 지역의 책임자였다.
강관순은 혁우동맹 조직원이었다. ‘우리는 가이 없는 해녀들’로 시작하는 해녀 노래의 작사가이기도 했다. 해녀 투쟁 당시 우도 청년들을 체포하려는 일본 경찰에 맞서 우도 해녀 800여명이 배를 포위하고 항의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1932년 조선일보에 실린 “800여명 해녀 대거‘ 하야 피검자 탈환기도’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도에서 남자 11명을 검거하여 가지고 우도서 떠나려 할 때에 팔백여명의 해녀가 배를 둘러싸고 배의 길을 막으며 방해함으로 경관은 부득이 공포 십여발을 놓아 해녀를 위협했다.”
이처럼 우도 역시 해녀 항일 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1947년 시위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고성화(1916~2013)는 우도의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3.1절 집회 주동자를 체포하려는 경찰을 피해 부산으로 탈출, 부산시당 4지구당 책임비서를 지내기도 했다.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던 복역 후 일본을 드나들며 통일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던 그가 다시 체포된 것은 이른바 1973년 이른바 ‘우도 사건’ 때문이었다. 이종사촌이었던 김승환이 남파되어 1973년 3월 3일 우도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는데 경찰이 요시찰 인물로 주목하고 있던 고성화와 그의 아내를 체포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된다.
당국은 ‘고정간첩 검거’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체포된 9명 중 3명은 남파간첩 김승환의 아내와 의붓딸, 고성화의 아내 등이었다. 당시 이들의 혐의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로 기소되었다. 이후 고성화는 무기, 나머지 3명에게는 징역 4년에서 3년이 선고되었다. 고성화는 이 일로 20년간 옥고를 치르다 1993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다.
평생을 사회주의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고성화. 우리는 지금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할까. 3.1절 기념집회를 주도하고,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며 통일된 조선을 희구하던 혁명가로, 아니면 남한 체제 전복을 꾀하던 ‘간첩’이자, 반국가 사범으로 기억해야할까. 그 기억의 간극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분단 체제의 모순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역사학자이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