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4일 제주민예총이 4·3예술축전 찾아가는 현장예술제 세 번째로 세화리예술제 ‘항쟁’을 개최했다. 공연팀과 시민들은 해녀박물관에서 세화 주재소 터, 세화리오일장 터 등을 거쳐 연두망 동산으로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5월14일 제주민예총이 4·3예술축전 찾아가는 현장예술제 세 번째로 세화리예술제 ‘항쟁’을 개최했다. 공연팀과 시민들은 해녀박물관에서 세화 주재소 터, 세화리오일장 터 등을 거쳐 연두망 동산으로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그 싸움은 그녀에게 비록 잠녀 개개인은 비천하고 무력하지만 똘똘 뭉쳐 조직화된 잠녀는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고귀한 집단임을 가르쳐 주었다. 

-현기영, <바람 타는 섬> 중에서

3·10총파업 조사·연구팀(팀장 박찬식)은 조천면에 이어 두 번째 조사 대상지로 구좌면을 선정했다. 이곳은 4·3 항쟁이 있기 10여 년 전 집단 항쟁을 경험한 지역이다. 바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손꼽히는 제주해녀투쟁.

4·3무장봉기의 역사적 연원, 해녀투쟁

1931년부터 1932년 1월까지 이어진 해녀투쟁은 구좌면 하도리·세화리·연평리·종달리, 성산면 시흥리·오조리 등지의 해녀들을 포함해 연인원 1만7130명이 참여했으며 집회와 시위 횟수만 238회에 이른다. 

원인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말도 안 되는 값에 수탈해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하 해녀조합)의 횡포에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과 가족이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운동은 생존권 수호를 넘어 일제에 저항한 민족해방 운동으로, 해녀 계층을 넘어 초계층적 운동으로, 구좌·성산면을 넘어 제주 섬 전체에 영향을 끼친 전 도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구좌면과 정의면(지금의 성산읍) 해녀 1000여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는 지난 1932년 1월12일 진행됐다. 이날은 다구치 데이키 신임 제주도사(사진)가 부임을 맞아 구좌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조선신문 1932년 1월16일자
구좌면과 정의면(지금의 성산읍) 해녀 1000여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는 지난 1932년 1월12일 진행됐다. 이날은 다구치 데이키 신임 제주도사(사진)가 부임을 맞아 구좌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조선신문 1932년 1월16일자

이러한 성격 때문에 해녀투쟁의 기억은 해방 직후 3·10 총파업 또는 4·3 항쟁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생계를 위해 물질을 하느라 학교에 다니기도 쉽지 않았던 해녀들이 이처럼 집단 항쟁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해녀투쟁 지도자 중 한 명인 김옥련 열사는 “야학강습소가 일본식민시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의식 있는 젊은 남성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하게 되고 여성들에겐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계기가 됐다”며 “간접적이고 장기적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로서 교육이란 방법으로 계몽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제주해녀투쟁을 이끌었던 해녀 지도자들은 야학을 통해 지역 청년들로부터 민족의식과 근대의식을 키우는 교육을 받았다. 청년들은 1930년 구좌면에서 신재홍과 오문규 등이 조직한 ‘혁우동맹’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은 지역 현안이었던 해녀조합의 해녀 수탈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해녀들은 투쟁을 전개하기 전 반드시 이들 운동가와 협의 과정을 거쳐서 결정할 정도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높은 교육열, 청년을 깨우다

이처럼 구좌면 청년들이 해녀나 농민 등 생산대중들에게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데 집중했던 이유는 이 지역의 높은 교육 열기와 맞닿아 있다. 앞서 연재한 조천면과 같이 구좌면도 교육열이 높았던 지역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제주도민들은 근대 교육기관 ‘개량사숙’을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개량사숙은 한문을 가르쳤던 서당과 달리 산술 등 근대 과목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다. 보통 4년 과정으로 운영됐다. 

(사진=조수진 기자)
김녕초등학교. 옛 구좌공립보통학교. (사진=조수진 기자)

구좌면의 경우 대부분 마을에 개량사숙이 세워졌다. 학생 수는 1921년 500여명에서 1922년 1200여명으로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두 배 가까이 늘어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이내 마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6학년 과정까지 개설된 보통학교 설립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구좌면 최초 보통학교는 1923년 7월 김녕리에서 문을 연 구좌공립보통학교(지금의 김녕초등학교)다. 동김녕리와 서김녕리 주민들이 학교 부지 3000평과 자금 6000원을 모집해 동복·덕천·송당리 주민들과 함께 제주도에 보통학교 설치 허가를 신청했다.  

공립학교 이외에도 지역 유지 등 주민들의 지원으로 사립학교가 잇따라 세워졌다. 1924년 11월 하도리 주민들이 사립하도보통학교(지금의 하도초등학교)를, 1924년 10월에는 행원리·월정리 주민들이 합동으로 사립중앙보통학교(지금의 구좌중앙초등학교)를 설립했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정규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주민들을 위한 야학강습소도 운영됐다. 해녀항일투쟁을 이끌었던 해녀 부춘화·김옥련·고순효 등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1회 졸업생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하도초등학교. 가운데에는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였다는 안내판이, 오른쪽엔 학교 설립 당시 구좌면장이었던 강공칠 초대 교장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사진=조수진 기자)
'하도리인사의 교육열'이라는 기사에 사립하도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한 지역 유지들이 나열됐다. 조선일보 1923년 3월25일자. 

 

항일운동가들의 재등장

해방 직후 전개된 구좌면의 좌익 사회운동은 제주해녀투쟁을 이끌었던 항일운동가 문도배, 오문규, 오화국 등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일본군이 철수하자 행정과 치안 시스템이 공백이 된 상황에서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에서 문도배가 구좌면 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은 잔류한 일본인들과의 마찰, 일제 통치에 협조한 조선인 관리들에 대한 폭행을 억제하는 등 자치 활동을 펼쳤다. 

이어 조직된 마을 자치 기구인 인민위원회에선 문도배가 위원장, 오문규가 부위원장, 오화국이 서기국장을 맡았다.  

청년으로 구성된 건준 청년동맹은 부녀동맹과 함께 전도적으로 조직돼 인민위원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청년동맹은 조선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됐다. 민청은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의 유관 조직으로 강력한 청년 단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결성됐다. 

1947년 1월 구좌면 민청 결성대회가 열렸던 세화리 공회당 옛터. (사진=조수진 기자)
1947년 1월 구좌면 민청 결성대회가 열렸던 세화리 공회당 옛터. (사진=조수진 기자)

구좌면 민청 결성대회는 1947년 1월30일 세화리 공회당에서 대의원 279명, 방청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오달존을 위원장으로, 한석범을 부위원장으로 선임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각 리별로 상도리 민청 위원장 홍주표, 종달리 민청 위원장 이응화, 부위원장 부옥만, 덕천리 민청위원장 박원길 등이 확인된다. 특히 종달리 민청 조직은 ‘6·6사건’으로 인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세화·김녕서 열린 3·1기념식 1650여명 참석

1947년 2월26일 구좌면사무소 사무실에서 약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좌면 3·1기념 준비위원회가 조직됐다. 이 자리에서 책임자 부대현, 부책임자 이찬희, 부원 이한정·부자도·김승순 등이 선임됐다. 이날 회의에선 김녕리와 세화리에서 3·1기념식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3월1일 오전 11시를 전후해 세화국민학교에 1300여명, 김녕국민학교에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하도리와 상도리, 종달리 주민들은 오전 10시쯤 마을 공회당과 향사에 모여 세화국민학교 집회 장소까지 시위행렬을 벌이기도 했다. 

‘3·1사건 체계도’에 따르면 세화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이 끝나고 일부 참석자들은 구좌면 내 일원에서 시위행렬을 이어갔다. 
 

“민족항쟁이었습니다.”

“도민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많이 괘씸했죠. 경찰한테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을 지라고 했는데 말도 듣지 않았잖아. 당연히 사람들이 항의 시위를 했지. 그래서 그때 제주도 95%가 전부 시위하지 않았습니까. 민족항쟁이었어요. 행정이고 뭐고 우체국이고 뭐고 다 마비가 됐었죠.”

지난 4월6일 조사팀은 하도리 출신 오수송씨(90)를 만나 3·1발포사건 때 마을 분위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오씨는 하도국민학교를 다니던 5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제주읍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관덕정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을 전해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격한 분노를 느꼈다는 오씨. 3·10총파업과 집회는 제주도민이라면 당연히 참여했을 ‘민족항쟁’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4월6일 오수송씨가 제주시 일도2동 자택에서 3·10총파업 조사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4월6일 오수송씨가 제주시 일도2동 자택에서 3·10총파업 조사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구좌면에선 11일 면사무소 공회당에 20여명이 모여 3·1사건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장에 부대현, 부위원장에 김은환, 총무부 강봉인 외 3명, 조사연락부 문무현 외 3명, 조직선전부 4명, 구호부 4명 등이 선임됐다. 

이들은 직장별로 3·1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구호금 및 위문문 모집, 파업 단행 결의문 및 성명서를 작성해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같은 날 구좌면사무소 파업단을 시작으로 김녕우편국, 제주금융조합 김녕지소, 제주어업조합 김념출장소, 접객업조합, 이발업조합 등에 파업단이 조직됐다. 학교별로는 11일 김녕중학원, 중앙·평대(옛 홍화)·세화·하도·종달·송당·연평국민학교 등에 13일엔 김녕국민학교에 파업단이 꾸려졌다. 

14일엔 월정리 중앙국민학교에 ‘구좌면 각 직장 파업단 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김이종)가 결성돼 구좌면 직장 파업을 총괄적으로 진행했다. 

구좌면 대책위원회는 마을별로도 대책위원회를 꾸려 파업과 함께 집회를 적극적으로 펼쳐갔다. 12일엔 김녕리에 14일엔 세화리에 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구좌면 주민들은 제주신보사가 전개한 희생자 조위금 모금에도 발 벗고 나섰다. 1947년 6월15일 마감한 모금 현황을 살펴보면 월정리민 1016원, 김녕중학원 1만112원 등이다. 
 

주민과 경찰 충돌

3·1사건 이후 구좌면에선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학생과 청년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경찰 당국은 이들을 검거하고 취조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미·소공동위원회 속개와 6·10항일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무허가 집회와 ‘삐라’(선전물) 부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하도리 한문옥 등은 미소공동위에 보낼 진정서 초안에 서문동 주민들로부터 서명 날인을 받았다. 5월26일 하도리에서는 오화국이 같은 내용을 옮겨 적은 삐라 300매를 소지했다가 적발됐다.

무허가삐라 사건 재판 기사. 제주신보 1947년 6월26일자. (사진=조수진 기자)
무허가삐라 사건 재판 기사. 제주신보 1947년 6월26일자. (사진=조수진 기자)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진정서 내용에는 “임시정부수립은 인민위원회의 형태로 수립하여 주시오”, “전농의 토지개혁안을 실시하여 주시오”, “남녀동등의 법령을 제정하여 주시오”, “지방선거는 민전의 행동강령에 의하여 실시하여 주시오” 등이 포함됐다. 

이 과정에 종달리에서 민청 회원들과 경찰 간 무력 충돌이 빚어진 ‘6·6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종달리에서 100여명이 모인 민청대회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들을 민청단원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다. 

이후 종달리 민청원들이 피신, 경찰이 수색작전을 펼쳐 숨어있던 청년들을 차례로 검거했다. 사건 발생 열흘 만인 6월16일경 경찰은 종달리 사건 수배자가 71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1년 뒤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희생됐다. 

종달리 사건을 거치면서 구좌면 대중투쟁은 잠시 중단됐다가 같은 해 8·15기념일을 앞두고 다시 활발해졌다. 7월4일 하도리에서는 청년들이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3상회의 결정 실천, 신탁통치 지지”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배포하려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또 오정표, 김태우, 부해성 등이 8월 초 민주애국청년동맹을 조직해 청년들을 가입시켰다. 7월30일과 8월1일 이틀에 걸쳐 고윤생(동김녕리), 김태행(한동리) 등 김녕중학원 학생들은 “맥류 공출반대, 신탁지지 무조건 석방”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작성해 부착했다. 8월4일엔 한상섭, 강원주(동김녕리) 등이 “강제공출 반대, 반탁은 매국노”라는 삐라를 마을 도로변에 살포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판결문 자료에 따르면 발포사건 이후 1947년 말까지 관련 수형인은 모두 245명에 이른다. 이중 구좌면 지역 출신 수형인은 21명이다. (박찬식, <1947년 제주3·1사건 연구-집회와 총파업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32, 2006년)
 

왜 사회주의인가

하도야학강습소 1회 졸업사진. 윗줄 왼쪽부터 홍문봉, 부춘화, 김봉혁, 김옥련, 송순옥, 부덕량, 고순효는 졸업생. 아랫줄 왼쪽부터 문무현, 부대현, 김남석, 강OO, 김태륜은 교사, 가운뎃줄에 있는 청년은 부춘화의 오빠 부승림으로 졸업생은 아님. (사진=박찬식, )
하도야학강습소 1회 졸업사진. 윗줄 왼쪽부터 홍문봉, 부춘화, 김봉혁, 김옥련, 송순옥, 부덕량, 고순효는 졸업생. 아랫줄 왼쪽부터 문무현, 부대현, 김남석, 강OO, 김태륜은 교사, 가운뎃줄에 있는 청년은 부춘화의 오빠 부승림으로 졸업생은 아님. (사진=박찬식, )

구좌면에서 진행된 항일운동과 해방 직후 미군정에 저항하는 운동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청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사회운동과 대중운동을 이끈 주역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배경은 무엇일까. 박찬식 박사는 <4·3과 제주역사>에서 이를 육지부와 비교해 낮은 생산력 경제구조와 섬이라는 지형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제주 섬사람들이 문화적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강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외부로부터의 압박은 자연스레 섬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이들을 조직해낸 것은 지도부의 사회주의 이념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제주도민들은 사회주의를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자치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받아들였다는 설명이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전문가와 한뼘 더 들어가기

※종달리 6·6사건

1947년 3·10총파업 이후 구좌면 주민들과 경찰 사이에 팽팽한 긴장 국면이 전개되는 가운데 종달리에서는 민청 회원들과 경찰 간에 무력 충돌이 빚어진 ‘6·6사건’이 일어났다.(<4·3은 말한다> 1권, 444~452쪽에 그 실상이 잘 정리되어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세화지서 옛터. 지금의 구좌파출소. (사진=조수진 기자)

‘종달리 6·6사건’을 관련 판결문에 의거해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종달리 민청위원장 이응화, 부위원장 부옥만, 구좌면 민청 부위원장 한태삼, 구좌면 민청위원 강기완 등이 1947년 6월 6일 오후 8시 30분경 종달리 ‘두머이게’(두문포 또는 두문잇개) 김두주의 집에서 종달리 민청대회를 열었다. 종달리 민청원, 주민 등 100여 명이 모인 이 날 회의에서 민청의 세포조직, 교양체육 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마침 당일 밤 10시 10분경에는 세화지서(주임 현학림) 순경 김순영·고일승·황종욱·최화훈 등 4명이 종달리를 시찰하던 중 자동차 정류소 앞에서 돌담에 삐라를 붙이던 청년 2명을 검문했다. 청년 2명 중 양원민은 금세 도망쳐 버렸고, 김주인은 체포됐는데, 그로부터 민청대회가 열리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하고 집회 장소로 향했다. 달아난 청년 양원민은 곧바로 민청원들에게 경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민청원들은 집단적으로 경찰들에게 몰려들어 구타를 가했다. 이로 인해 경찰 김순영·고일승은 전치 1개월, 황종욱·최화훈은 전치 3주일의 부상을 입었다.

이 사태 직후 종달리 민청원들은 모두 피신해 버렸고, 제주경찰서의 응원 기동경찰이 다음날 새벽 4시경 종달리에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은 마을 주변에 대한 수색작전을 펼쳐서 숨어있던 청년들을 차례로 검거했다. 사건 발생 열흘 만인 6월 16일 경찰당국은 종달리 사건 관련 수배자가 71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6월 18일 이 사건의 주모자인 부옥만이 하도리 누나 집에서 검거되었다.

종달리 사건 관련자에 대한 공판은 7월 10일, 7월 24일, 7월 31일 세 차례에 걸쳐 제주지방심리원 법정에서 열렸다. 7월 10일 부옥만 등 18명이 징역형·벌금형 등 실형에 처해졌다. 이어서 7월 31일 김주신 등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종달리사건 재판 기사. 제주신보 1947년 8월2일자. 

이들 중 상당수가 1년 뒤 4·3봉기 이후 희생되었다. 현봉추·강태영·현두삼은 1948년 12월 군법회의에서 각각 사형,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행방불명되었다. 한중남은 같은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종달리 사건 당시 종달리장이던 김석호는 1948년 12월 18일 토벌대에 총살당했다, 임병익·김호준·김태길 등은 무장대 납치 후 행방불명되었다. 임두선은 사건 후 민보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3일 무장대에 총살당했다.

한편 당시 20세의 청년이던 고태삼은 징역 단기1년 장기2년형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서 만기 복역 후 석방됐다. 고문에 못이겨 경찰관 폭행의 누명을 뒤집어쓴 고태삼은 9순 넘도록 평생을 억압에 눌려 지내다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작년 3월 16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는 고태삼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70년 넘는 전과자의 멍에를 벗게 되었다.

일반재판에서 형사처분을 받았던 생존 수형인 고태삼, 이재훈 어르신이 72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nbsp;(사진=박소희 기자)
지난해 3월16일 4·3당시 일반재판에서 형사처분을 받았던 생존 수형인 고태삼(휠체어에 앉으신 분), 이재훈 어르신이 72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사진=박소희 기자)

종달리 6·6사건은 1947년 3·1집회, 3·10총파업과 1948년 4·3무장봉기와 대학살의 전체 흐름의 중간에 위치한 역사적 사실로 주목된다. 3·1발포사건에 대한 폭력적이며 감정적인 반발 대응을 억제하고 비폭력적 총파업에 나섰던 제주도 대중운동 진영은 미군정 당국의 강경 탄압에 맞닥뜨렸다. 

종달리 6·6사건은 경찰의 탄압에 대한 청년들의 폭력적 대응으로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응징은 지나쳤다. 이러한 종달리 청년들의 움직임은 이듬해 4·3의 무력적 봉기로 가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폭력과 살상이 연속되는 속에서 제주 민중들의 선택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3월 2건의 청년·학생 고문치사 이후 남은 길은 무력봉기 외에는 없게 되었다.

박찬식.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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