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5일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오화국 선생의 딸 (왼쪽부터)오계숙, 오희숙, 오기숙 할머니를 만났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4월5일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오화국 선생의 딸 (왼쪽부터)오계숙, 오희숙, 오기숙 할머니를 만났다. (사진=조수진 기자)

“내 아부지가 하도 경찰에 쫓겨서 화장실에도 숨고 남의 집 창고에도 숨고, 우미마다리 소곱에 곱고(우뭇가사리 자루 속에 숨고)…. 우리 언니랑 나는 이웃집으로 피신하고 그랬지요.”

“우리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어요. 인편으로 부산으로 갔다는 말은 들어신디(들었는데). 순경들이 찾아와서 할망(할머니)하고 하르방(할아버지)한테 ‘아들만 내놔라’ 해신디(했는데). 우리도 그때는 무서워서 밤에는 다른 집에 몰래 숨어서 자고 그랬어요.”

“어릴 땐 ‘우리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구나’ 그러면서 원망했어요. 평범하게 그냥 고등학교 다니고 했으면 면장이나 도지사도 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왜 학생 운동을 하셔서….”

세 자매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 3·10총파업 조사·연구팀(팀장 박찬식)은 지난 4월5일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오희숙(86), 오계숙(80), 오기숙(77) 할머니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오화국 선생의 딸들이다. 
 

일제강점 교육에 항의한 ‘고등학생’, 구속되다

오화국은 1914년에 태어나 사립하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제주공립농업학교(지금의 제주고등학교·이하 제주농업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유일한 중등학교였다. 이 시기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던 때다. 

오화국 선생. (사진=오기숙 제공)
오화국 선생. (사진=오기숙 제공)

제주 학교 현장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주농업학교에선 교장이 일제 교육에 저항한 학생들을 퇴학시키거나 유급시켰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학교 측에 강경하게 항의했고 일제 경찰들은 이들을 모두 구속했다. 

이를 본 오화국 등 학생들은 모든 책임이 교장에게 있다며 1930년 3월9일과 다음 날 교장 사택과 관사를 찾아가 항의했다. 당시 교장 관사를 방문한 지바(千葉) 제주도립병원장은 학생들이 기물을 부수었다며 경찰에 알렸다. 학생들은 모두 체포됐다. 오화국은 이 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미결(법적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 기간 옥고를 치렀다. 

“아버지가 열여덟 살에 감옥에서 나와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퇴학당하니까 학교도 다시 못 다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배 타는 거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기관장을 하다가 배에 불이 나서 화상을 입으니까 얼굴이 거뭇거뭇해졌어요.”

오화국은 결국 제적 처분을 받았다. 이후 번듯한 직장에 취업할 수 없었다. 뱃일을 하거나 면사무소에서 임시직을 얻어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하곤 했다. 일제에 항의했던 ‘고등학생’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지며 평범한 가장의 삶을 사는 듯했다. 
 

자주를 꿈꾼 ‘청년’, 또다시 구속되다

“우리 이모가 ‘니네 아방이(아버지가) 키는 조그마해도 요망졌져(야무졌어)’ 그랬어. 3·1절 대회할 때 세화장터에 가서 연설문도 낭독하고 했대요.”

오화국은 일제강점기 제주해녀투쟁을 이끌었던 항일운동가 문도배와 오문규 등과 함께 구좌면에서 사회운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드디어 우리 민족이 한반도의 주인이 되리라 꿈꿨던 믿음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미군이 들어와 한반도 이남을 점령하더니 친일 경찰들이 그대로 총칼을 차고 주위에 있었다. 

지난 5월14일 제주민예총이 4·3예술축전 찾아가는 현장예술제 세 번째로 세화리예술제 ‘항쟁’을 개최했다. 공연팀과 시민들이 세화리 오일장 터에서 90년 전 해녀항쟁을 재현하고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오화국 선생은 1947년 3월 1일 세화장터에서도 연설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5월14일 제주민예총이 4·3예술축전 찾아가는 현장예술제 세 번째로 세화리예술제 ‘항쟁’을 개최했다. 공연팀과 시민들이 세화리 오일장 터에서 90년 전 해녀항쟁을 재현하고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오화국 선생은 1947년 3월 1일 세화장터에서도 연설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판결문에 따르면 오화국 선생은 해방 이후 마을 자치 기구인 구좌면 인민위원회에서 서기국장으로 활약했다. 제주도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기념대회가 열렸던 1947년 3월1일. 오전 11시30분 세화국민학교에서 구좌면 주민 1000여명이 모였던 집회를 이끌기도 했다. 같은 날 세화장터 등지에서도 연설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민의 공분을 샀던 3·1발포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알리고 미군정과 경찰당국에 항의하는 데에도 적극 나섰다. 3월11일엔 오후 8시쯤 하도국민학교 직원실 입구에 ‘발포책임 경찰관 처단’과 ‘교원의 자유 보장’ 등이 적힌 삐라(전단지)를 붙였다.  

같은 해 5월26일 본인의 집에서 “정권 형태는 인민위원회로”라는 내용의 삐라를 작성하던 중 경찰에 적발, 구속됐다. 이 때문에 징역 10월을 선고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오화국 지사는 약 8개월 수감 생활을 한 뒤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날은 1948년 4월1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이틀 전이다. 

오계숙씨는 “그때 한창 순경들이 이 집, 저 집에서 사람 심어(잡아)갔다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며 “우리 아버지가 그걸 듣고 ‘나도 여기 있다간 죽을 판이구나’ 생각해서 바로 육지로 나갔다고 한다”고 떠올렸다. 

고된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집에서 가족들과 보낸 시간은 단 하룻밤이었다. 가족에 따르면 오화국 선생은 3·1 발포사건에 항의했던 운동가들이 대거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갔다. 그대로 제주에 머무른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안전도 담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가족들에게 이어진 국가폭력

오화국 선생이 부산으로 피신한 뒤 그 가족들은 낮에는 집에 있다가도 밤이 되면 동네 다른 집에서 방을 빌려 자곤 했다. 순경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총을 들이대거나 공중에 총을 쏘며 ‘아들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온갖 물건들을 던지고 발로 차고 깨뜨려서 멀쩡한 항아리가 없을 정도였다. 

지난 4월5일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오화국 선생이 살았던 집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4월5일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오화국 선생이 살았던 집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머물렀던 부산에 다녀온 뒤 임신한 몸으로 경찰에 잡혀가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나마 고문을 받던 중 배가 불러온 것을 보고 경찰이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딸들은 가족들이 두려움에 떨며 고통받은 나날을 두고 “그때 아버지를 정말 원망 많이 했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아버지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비참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선택이 가족을 위한 최선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오화국은 한국에서 사는 것 또한 여의찮다는 생각에 1951년 또는 1952년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밀입국자 신분이라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신세가 됐다. 일본에서 자리를 잡아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조카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딸들은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힘들게 사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겼던 것 같다”고 짐작했다. 
 

족쇄;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4·3과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오화국 선생과 그 가족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오 지사는 국가보안법에 묶여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가족들이 겪은 연좌제 피해는 극심했다. 

다섯 남매 중 유일한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연좌제로 최종 불합격 처리됐다. 당시 크게 낙담했던 그는 남한에선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리란 걸 직감하고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여권도 없이 아버지와 계속 일본에서 숨어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4월5일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오화국 선생이 살았던 집을 찾았다. (왼쪽부터)오기숙·오희숙·오계숙 자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4월5일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오화국 선생이 살았던 집을 찾았다. (왼쪽부터)오기숙·오희숙·오계숙 자매. (사진=조수진 기자)

 

“1960년대에는 북한에서 공짜로 공부를 시켜준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오빠가 만경봉호를 타고 이북에 간 거죠. 한국에선 연좌제 때문에 공부도 못 하고 일본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그때 아버지가 이북 가려는 걸 막으려고 오빠를 붙잡고 철길에 드러누워서 죽겠다고 했대요.”

오빠는 아버지의 끈질긴 만류에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 북한으로 가 대학을 다녔다. 그는 특히 언어 습득력이 뛰어나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배워 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 채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기는 힘들었을 터. 오화국 선생은 제주에 있던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자 1972년쯤 아들이 있는 북한으로 갔다. 

“아버지가 이북으로 갔다고 하니깐 여기선 국가보안법 때문에 가족들도 피해를 봤어요. 우리 형부도, 사돈 집안의 신랑도 그렇고 경찰도 못하고 원양어선도 못 탔어요. 나도 교원양성소(지금의 사범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해서 갔더니 아버지 때문에 불합격이라 하더라고요.”

끝날 줄 알았던 연좌제의 피해는 계속됐다.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농사 짓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은 평생을 입을 닫고 살았다. 딸들은 ‘아버지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안 겪어도 될 고통을 겪었다’며 원망만 했다.
 

아버지를 이해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쉬쉬했던 4·3의 진상이 서서히 세상 밖으로 드러나자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일제에, 미군정에, 국가폭력에 맞섰던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비참한 삶을 택했다. 

지난 6월6일 문을 연 제주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 내 오화국 선생이 제2차 항일운동(교장관사습격사건)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이 가족들에게 안내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6월6일 문을 연 제주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 내 오화국 선생이 제2차 항일운동(교장관사습격사건)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3·10총파업 조사·연구팀이 가족들에게 안내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기까지는 반백 년이 걸렸다.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는 지난 2005년 1차 남북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진행했다. 북한에선 아들이, 남한에선 네 딸들과 부인이 자리했다. 그러나 오화국 선생은 1995년 10월 세상을 떠나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딸들은 이제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나섰다. 시작은 아버지의 졸업장을 받는 일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TV를 보는데 제주고등학교가 관사 습격 사건으로 제적 처분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딸들은 학교를 찾아갔다. 그들이 받은 것은 오화국의 졸업장이 아닌 상처였다. 

“학교에서 ‘오화국씨 이북 갔잖아요’ 그러더라구요. 졸업장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쌀쌀맞게 그러는데 너무 속이 상했죠. 아버지가 말마따나 김일성이 좋아서 북한에 간 겁니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아들하고 같이 살겠다고 간 거잖아요.”

오화국 선생이 만약 4·3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나서 계속 제주에 머물렀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삐라를 소지했다가 징역형을 살았던 이력 때문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북한으로 간 선택이 항일운동을 했던 공적을 지울 순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오화국 선생을 항일운동가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더뎠다. 가족들은 지난해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다. 고영철 제주독립운동가서훈추천위원회 자료발굴위원장이 관련 기록과 자료를 모아 이 과정을 도왔다. 국가보훈처에서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서 가족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한 달여 뒤 받은 심사 결과는 ‘거부’. 독립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게 이유였다. 고 위원장은 오화국 선생이 북한으로 간 것과 1947년 3·10총파업 당시 징역형을 받은 점이 ‘행적 불분명’의 이유일 것이라 설명했다. 그는 이런 정부의 판단이 불합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 위원장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그에 맞는 대우를 하는 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냐”며 “오화국 지사가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명백히 있으니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남한 정부 수립 이후 행적이 어떻다느니 하는 별개의 사유로 거부한다는 건 합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90년 만의 졸업장, 그리고 4·3희생자 결정

가족들은 멈추지 않았다. 더디지만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3·10총파업 조사팀은 오화국 선생의 딸들을 만난 뒤 제주고등학교 측에 명예졸업장 수여를 적극 제안했다. 그 결과 지난 6월6일 제주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열렸다. 

지난 6월6일 제주고등학교에서 오화국 선생에 대한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열렸다. 오기숙(왼쪽)·오계숙(오른쪽) 자매가 아버지 대신 졸업장을 받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6월6일 제주고등학교에서 오화국 선생에 대한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열렸다. 오기숙(왼쪽)·오계숙(오른쪽) 자매가 아버지 대신 졸업장을 받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90년 만에 아버지 대신 받아든 졸업장. 가족들은 “이 졸업장 하나만으로도 그동안 서러움과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이 씻기는 것 같다”며 “도와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말했다.

지난 7월엔 아버지가 4·3희생자로 결정됐다는 연락도 받았다. 오기숙 할머니는 “사실 우리 아버지가 희생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해서 신청도 안 하고 있었다”며 “우리 아들이 평소에 외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백방으로 자료를 찾아다니며 '할아버지 같은 분들은 당연히 되어야 한다'며 작년에 희생자 신청까지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 유공 서훈과 4·3희생자 신청 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화국 선생의 딸들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됐다. 오기숙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런 아버지가 있었다는 게 당당하고 자랑스럽다”고 뿌듯해했다. 

자주독립이라는 꿈을 품은 채 개인의 삶을 내던지고 평생을 현대사의 칼끝 위에 살았던 오화국. 그리고 수많은 ‘오화국’들이 시대착오적인 이유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인정하는 일은 한국 역사의 빈틈을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화국 선생의 항일운동 관련 내용은 <제주고 항일운동기>(제주고등학교·제주고등학교총동창회, 2021년) 중 오화국(자료 출처 ‘고영철의 역사교실’) 부분을 참고했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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