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8기는 임기 2년 내 대안을 마련하고 도민 의견 수렴과 주민투표를 통해 2026년 지방선거에서 기초자치단체 선거를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그러면서 국내에서 시도된 적 없는 기관통합형' 모델을 제시해 지금까지의 논의를 원점화 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제주투데이>는 강봉수 논설위원이 제기한 '3개의 기초자치단체와 교육권역을 제안한다'를 필두로 기초자치단체 도입을 둘러싼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정치권이 제안한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시민과 전문가 등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담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오영훈 도정 출범 이후 제주형 기초자치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며 여기저기서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좋은 현상이기는 하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뭔가 기본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든다.
이에 기본을 돌아본다는 차원에서 정치의 본질에 대해 한번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통상 정치라고 하면 사람들은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잡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치의 본질은 그런 데에 있지 않다. 정치의 본질은 공동의 것을 결정하는 것에 있다. 공동의 것을 어떻게 형성·유지·배분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의 알짬이다.
문제는 누가 결정하느냐
이와 관련 일반적으로 세 가지 방안이 제시된다. 군주정, 귀족정, 그리고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군주정이란 세습 또는 선거로 선출된 1인이 공동의 것을 결정하는 것을 말하고, 귀족정이란 세습 또는 선거로 선출된 소수가 공동의 것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민주주의란 공동의 것을 1인 또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군주정과 귀족정은 능력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공동의 것은 능력자가 결정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정당하다고 본다. 권력은 능력자의 것이지 아무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정은 평등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공동의 것을 1인 또는 소수가 결정하면 다수는 그 지배를 받는다고 본다. 우리가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모두가 평등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권력을 갖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는 독립적인 정치공동체였는데 인구가 수천에서 수만 명에 불과해 오늘날 읍면동 규모에 해당하는 마을공화국이었다.
폴리스에서는 공동의 것 대부분을 모든 시민이 직접 또는 추첨을 통해 결정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기에 능력 원리가 아닌 평등 원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이다.
오늘날 소위 민주국가에서는 대부분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다. 폴리스와는 달리 현대국가는 규모가 너무 크고 사무가 매우 복잡하므로 능력이 떨어지는 보통 시민 대신 선거를 통해 선출된 1인 또는 소수의 유능한 엘리트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 그 주된 논거다.
그런데 대의제는 능력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대의제의 본질적 성격은 선거제와 결합한 군주정·귀족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통령, 자치단체장은 선거로 선출된 임기제 군주다. 국회, 지방의회 역시 선거로 선출된 소수의 엘리트로 구성되므로 귀족정의 속성을 띤다.
그런 까닭에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본래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공익을 명분으로 엘리트에게 통치 수단을 주기 위해 고안됐다.”
장 자크 루소도 이런 말을 했다.
“시민은 선거 때만 주권자가 되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
대의제는 위장된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우리 헌법은 제1조 제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공동의 것을 결정하는 정치적 주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에 의하면 국민은 누구나 정치적 주체로서의 몫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대의제를 기본적 정치 체제로 채택한 결과 현실에서는 국민이 아니라 1인 또는 소수의 엘리트 정치인이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대통령·국회의원 등 엘리트 정치인이 국민을 대신하여 공동의 것을 결정한다. 국민은 그 결정에서 소외되어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몫 없는 이들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자치의 틀을 대의제로 하고 있기에 정치적 주체는 제주도민이 아니라 도지사와 도의회다. 제주도민의 공동의 것은 도지사와 도의회가 다 결정한다. 정작 주권자인 제주도민은 결정권이 없다. 정치적 결정권에 관한 한 제주도민은 몫 없는 이들에 불과하다.
물론 커다란 국가나 제주특별자치도 단위에서 국민 또는 제주도민 모두가 함께 공동의 것을 결정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구 10만 명이 넘어가면 폴리스를 할 수 없다고 했다. 10만 명 이상의 커다란 정치공동체에서는 부득불 엘리트가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국가나 제주특별자치도와 같은 커다란 단위에서는 엘리트 통치제도인 대의제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풀뿌리 단위에서조차 대의제를 관철할 필요가 있을까?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처럼 주민이 직접 또는 추첨으로 공동의 것을 결정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는 없을까?
풀뿌리 민주주의 실천 : 읍·면·동 마을기금 제도화
민주주의는 본래 몫 없는 이들이 몫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시민 누구나 정치적 주체로서의 몫을 갖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다. 그렇다면 국가나 제주특별자치도 차원이 아닌 풀뿌리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가 공동의 것을 함께 결정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정치적 주체가 되는 진짜 민주주의를 해보는 것은 어떤가?
그런 방법 중 하나가 읍면동 마을기금의 제도화다. 제주특별법을 개정해 국가 및 지자체가 출연하고 주민이 공동소유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는 읍면동 마을기금(읍면동 주민 공동의 것)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는 것이다.
그렇게 읍면동 마을기금이 제도화된다면 도지사나 도의회뿐만 아니라 제주도민도 정치적 주체로서의 몫을 누리게 될 것이다. 풀뿌리 차원에서 진짜 민주주의가 펼쳐지며 제주도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제주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마을기금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유튜브(☞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시·군 자치 이전에 진짜 민주주의 먼저
한편 제주형 기초자치 관련, 5~6개 기초자치단체 또는 3개 기초자치단체로 실시하자는 주장이 있다. 이는 대의제를 전제로 하는 시·군 자치 부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오직 도지사와 도의회만이 주인공이 되는 특별자치보다는 비록 여전히 엘리트 통치이기는 하나 시장·군수와 시·군의회도 주인공으로 한 몫을 하는 특별자치가 정치적 주체의 폭을 약간 넓힌다는 차원에서 조금은 낫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위 주장을 무조건 배척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 주장은 특별자치도의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방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별자치도라면 기초자치 또한 특별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먼저 제주형 기초자치의 방안으로 읍면동 마을기금을 제도화하여 주민이 직접 또는 추첨으로 공동의 것을 결정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실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해보고 나서 그래도 시·군 자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고민해 봐도 늦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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