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들, 그 중 먼지에 쌓여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햇살 아래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꼬닥꼬닥_마을신화]연재를 시작한다. 구술 채록된 제주 마을의 신화 가운데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도 하고 답사도 진행했다. 마을에 전해오는 신화를 공유하고 보전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신성성을 되찾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는다.
아주 오랜 옛날, 가시리의 한 여자아이가 오름 너머 한라산 골짜기로 홀연히 사라졌다. 당남우영할망당에 전해오는 신화를 읽으며 소녀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옛날 문 씨 영감이 뒤늦게 딸 하나를 낳고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문 씨 아기씨 일곱 살이 되던 해 산딸기 따 먹으려고 우그리동산에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앞으로 감싸고 뒤로 걷히고 하는 게 아닌가. 아기씨는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 못하고 헤매었다.
어슥더슥 안개를 휘저으며 나아가는데, 문득 청구름이 두둥실 흘러가는 게 보였다. 아기씨는 청구름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걷다 보니 어느덧 한라산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서고 말았다. 아기씨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고 또 올랐다. 그렇게 오르다 보니 어느덧 백록담에 다다랐다.
한라산 꼭대기에 올라 백록담 둘레를 빙빙 돌다보니 산신백관이 모여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기씨는 쭈그리고 앉아서 산신백관이 장기 두는 걸 구경하였다. 그렇게 구경하느라 아버지도 잊어버리고 어머니도 잊어버렸다.
아기씨는 까마귀를 벗을 삼아 구름을 타고 놀았다. 바람을 먹고 나무에 오르면서 산다는 것이 어느덧 일곱 해가 되었다. 아기씨 얼굴과 손발은 사람이로되 몸뚱이는 나무처럼 얼기설기했다. 가시덤불에 긁혀 허물이 가득한 위로 이끼도 올라앉았다.
서홍리 허 포수가 족제비 가죽으로 다리를 감싸고 한라산으로 사냥 갔다. 노루 사슴을 찾아다니는데 저만치서 거뭇한 것이 움직거렸다. 허 포수가 짐승인가 해서 화승총을 겨누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가만가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멀뚱멀뚱 서 있는 게 몸뚱이는 나무와 매한가진데, 눈은 분명히 사람 눈이었다.
허포수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귀신이거든 저승길에 들어서고, 사람이거든 정체를 밝혀라.”
“귀신이 어찌 이런 곳에 있겠습니까? 나는 가시리 문 씨 영감 외딸아기우다.”
“문 씨 영감의 귀한 딸아이가 어찌하여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이냐?”
“산딸기 따 먹으러 왔다가 짙은 안개에 길을 잃어 한라산으로 들어섰수다. 어머니 아버지도 못 보고 일곱 해가 지났으니 나를 우리 부모님한테 데려다줍서.”
허포수가 은장도로 아기씨 몸에 뒤덮은 이끼며 덩굴을 걷어내고 무명천으로 포대기 삼아 둘러업었다. 그러고는 산에서 내려와 문 씨 영감네로 데려갔다.
“어르신 외딸아기 찾아왔수다.”
문 씨 영감 내외는 딸을 찾아다니느라 마음고생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딸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키여.”
아기씨가 부모님께 다가가 여쭈었다. “어찌하여 어머니 아버지 눈이 어두워졌습니까?”
“딸아이 잃고 밤낮으로 눈물 흘리다보난 눈이 어두워졌져.” 문 씨 아기씨가 손으로 어머니 아버지 눈을 삼세번 쓸어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훤하게 밝아졌다.
“아이고, 우리 딸이 분명허다!”
문 씨 영감과 부인이 딸아이를 얼싸안고 울음을 쏟아낸 후 허포수에게 고맙다고 절을 하였다. 문 씨 영감이 허포수에게 어떻게 은혜를 보답해주면 좋을지 물었다. 허포수는 돈을 주겠다고 해도 싫다 하고,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였다.
“그러면 무엇으로 공을 갚으리오?”
“이 애기씨 죽어가민 군졸로 얻어먹으쿠다.”
허포수는 문 씨 아기씨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닌 걸 알고, 후에 신으로 단골들에게 제를 받을 때 같이 군졸(하위신)로 대접을 받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산에서 일곱 해를 살다 내려온 문 씨 아기씨는 눈을 뜨면 이승 일을 알고 눈을 감으면 저승 일을 알았다. 이런 소문이 퍼져나가니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아기씨한테 와서 묻고 갔다.
하루는 정의고을 원님이 인궤(관아에서 도장을 보관하는 상자)를 잃어버렸다. 원님은 사람을 풀어 곳곳을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문 씨 아기씨를 가마에 태워 모셔오라. 문점을 해 보리라.”
문 씨 아기씨를 모셔 와 인궤의 행방을 묻자 아기씨가 이리저리 짚어보고는 대답했다. “영주산 오름 앞으로 해서 어디 어디를 가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문 씨 아기씨가 일러주는 곳에 가 보니 정말 인궤가 숨겨져 있었다. 원님이 고마워하면서 아기씨한테 재물을 챙겨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런데 연주청에 메밀떡(연주 꿀에 쌀가루로 만든 연추형의 떡)을 만들어다 주니까 맛있게 받아먹었다.
아기씨가 떡을 맛있게 먹고 나서, 옆에 있는 사람한테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다. “정축일입니다.”
“그러면 이후로 정축일에 나에게 메밀떡을 바치도록 하라. 그리하면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주겠다.”
한편 인궤를 숨겼던 통인은 사실이 밝혀지면 목숨이 위태로우리라 생각하고 밤 깊은 시각에 아기씨를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아기씨는 통인을 불쌍하게 여기고 살 방도를 일러주었다.
“오늘 밤 저기 청산면 방뒷개(성산읍 신양리 포구)에 가보면 난데없는 배 하나가 떠 있을 것이다. 그 배를 타고 육지로 가면 살 수 있으리라.”
통인이 문 씨 아기씨가 일러준 대로 바닷가로 가 보니 과연 배 하나가 떠 있었다. 통인이 배에 올라타자 순풍에 돛 단 듯 배가 앞으로 내달아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통인은 연 삼 년 육지에서 살다가 아기씨 은혜를 갚으려고 열두 폭 홑단치마에 토시며 두루마기를 장만하고 찾아왔다. 그런데 아기씨는 이미 죽어버렸고, 아기씨가 살았던 곳에는 커다란 암석이 있었다. 그래서 통인이 암석 아래 구덩이를 파서 저고리 치마를 묻어놓고 음식을 차려 제사를 올렸다.
“저승 갈지라도 이 옷을 찾아 입고 가십서.”
그날 이후 이곳은 문 씨 할망을 모시는 신당이 되었다. 이곳에 가서 빌 때는 정축일에 오물떡과 생선을 장만하고 간다. 제사를 정성으로 올리면 문 씨 할망이 물비리 당비리 피부병이며 눈이 아픈 데도 다 걷어주고 몸 편안하게 해 주었다.
(진성기,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
가시리는 가시오름,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등 열세 개의 오름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형성되었다. 한라산 자락에 위치해서 그런지 신화의 주 무대는 한라영산이다. 보통 영웅서사의 모티브는 어린 시절 세상으로 나아가 고난을 겪고 난 후 공을 세워 돌아오는 과정이다.
문 씨 아기씨 신화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일곱 살에 한라산으로 들어간 후 칠 년 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 이치를 꿰뚫어 보는 눈을 길렀다. 그런 후에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신으로 좌정하였다.
문 씨 아기씨가 한라산에서 보낸 칠 년은 영웅으로 거듭나는 시간이다. 자연과 어우러져 살다 보니 나무처럼 몸에 이끼가 다 났다. 이른바 물아일체, 자연과 하나가 된 것이다. 또한 이승과 저승의 일을 꿰뚫어보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영웅의 서사로 부족함이 없다.
가시리는 전통신앙이 잘 전승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가시리 본향 구석물당에서 신년과세제(신께 세배를 올리는 당굿)를 열고 있다. 구석물당과 함께 소꼽지당과 승지물 돗당 모두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물이 귀한 지역에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한 것과 관련 있다.
과수원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당남우영문씨할망당은 개별적으로 다녔던 곳이다. 이제는 찾는 사람도 없고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니 신화 속에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연
국어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으며, 현재 제주 신화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 등을 추억과 함께 담아낸 <제주의 파랑새>(도서출판 각), 제주의 마을길을 걸으며 신화와 만나는 <신화와 함께하는 당올레 기행>(알렙, 공저)과 <제주 당신을 만나다>(알렙, 공저),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르며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와 아이들이 제주신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학습으로 만나는 제주신화>(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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