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들, 그 중 먼지에 쌓여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햇살 아래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꼬닥꼬닥_마을신화]연재를 시작한다. 구술 채록된 제주 마을의 신화 가운데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도 하고 답사도 진행했다. 마을에 전해오는 신화를 공유하고 보전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신성성을 되찾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는다.
큰물당 조상님이 한라산 서쪽어깨 무유알에서 솟아나 산방산으로 내려왔다. 조상님이 여지물 동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너른 들녘이 풍요로워 부유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상님은 산방산 골짜기로 가서 산돼지 열세 마리를 잡아왔다. 그러고는 젊은이들에게 한 마리씩 먹이고 논 한 판씩 파게 했다. 조상님이 논 열세 판을 만들어 논농사를 일구니 천하거부가 되어 천함과 귀함을 알지 못했다.
하루는 소사중이 시주를 받으러 왔다.
“너는 어찌하여 권제 삼문을 받으러 다니느냐?”
“권제 삼문 받아다 헌 절도 수리하고 헌 당도 수리하려 합니다.”
“헌 절 수리하고 헌 당 수리하게 해 주면 대신 내게 뭘 주겠느냐?”
“귀함과 천함을 알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귀함과 천함을 알 수 있게 해준단 말이냐?”
“되 아홉, 말 아홉, 푸는 체 아홉을 매일 큰 당물에 씻어서 문 앞에서 올레까지 엎어놓고 이레 동안 타서 가고 타서 오면 귀함과 천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큰물 조상님은 소사중이 시키는 대로 되 아홉, 말 아홉, 체 아홉을 올레까지 엎어놓고 그 위를 타고 오가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홍수가 나 논의 벼를 모두 쓸어가 버렸다. 하루아침에 흉년으로 배를 곯게 되고 보니 귀함과 천함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깨달았다.
조상님은 깨달은 바에 따라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경작하던 논과 밭을 다 나누어주었다. 그러고선 이 세상을 하직하니 사람들은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본향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진성기,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
언젠가 사계리 단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 적이 있다. 확 트인 전경과 너른 들녘, 잘 정돈된 밭들이 장쾌하고 아름다워 감탄의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큰물당 조상님이 여지물동산에 올라 바라보았다는 광경이 이러했을까.
사계리는 마을 한가운데가 주변 지형보다 낮은 습지이다. 제주의 화산토는 물을 가두기 어려운 까닭에 논농사가 잘 되지 않는데, 사계리에서 논농사가 가능했던 이유이다. 큰물당 신화는 이렇게 논농사를 짓게 되었던 마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큰물당신이 귀함과 천함의 차이를 깨닫는 과정에서 비바람이 몰아쳐 논의 벼를 다 쓸어가 버렸다. 실제 사계리는 바람이 산방산과 단산 사이로 불기 때문에 그 강도가 아주 센 모양이다.
비바람이 몰아쳐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수많은 곡식이 쓸려가 버렸다고 김석익의 『탐라기년』(1865년)에 기록될 정도다. 거센 바람에 모래와 돌멩이가 날아와 집과 밭을 뒤덮으니 마을 사람들은 해안가 모래언덕에 순비기나무를 심으며 방어벽을 치려고 애썼다.
다 같이 힘을 모아 풍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온 이력은 큰물당신을 모시고 은덕에 감사하면서 제를 올리는 전통과 맞닿아 있다. ‘사계리 큰물당’은 정월 초하루와 팔월 보름에 당제를 지냈는데,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집마다 벼 한 단씩 거두어서 제단에 올렸다. 당굿을 주재하는 심방은 쾌자를 입고 큰물당 당신이 산돼지를 잡았던 ‘신맞이 동산’에 올라가 신을 청해 왔다고 한다.
사계리에 가면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사계포구와 형제섬 등, 눈 닿은 곳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여서 그런지 민박집과 카페, 식당 들이 즐비하다. 논농사의 흔적이나 해안가에 순비기나무를 심던 공동체의 노고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번화해졌다.
팔월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큰물당 조상님의 흔적을 찾아다니다 ‘큰물’을 발견했을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큰물’은 여전히 샘솟아 흐르고 있었고, 큰물당 주변으로 습지가 소박하게나마 펼쳐졌다. 큰물당 조상님의 신화는 샘솟는 용천수와 함께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깨달은 하루였다.
여연
국어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으며, 현재 제주 신화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 등을 추억과 함께 담아낸 <제주의 파랑새>(도서출판 각), 제주의 마을길을 걸으며 신화와 만나는 <신화와 함께하는 당올레 기행>(알렙, 공저)과 <제주 당신을 만나다>(알렙, 공저),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르며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와 아이들이 제주신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학습으로 만나는 제주신화>(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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