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들, 그 중 먼지에 쌓여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햇살 아래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꼬닥꼬닥_마을신화]연재를 시작한다. 구술 채록된 제주 마을의 신화 가운데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도 하고 답사도 진행했다. 마을에 전해오는 신화를 공유하고 보전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신성성을 되찾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입춘 경에 어사가 대정에 들어서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시냇물이 넘쳐흘러 나아가기가 힘들어지자 잠시 광정당 옆에 앉아 쉬기로 했다.
어사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통인이 심심하던 차에 놀이 삼아 말채찍으로 흙을 짓이겨 사람 모양을 만들었다. 통인은 흙으로 만든 인형을 담 구멍에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너는 여기 앉아 가는 손님 오는 손님 말 발이나 절게 하면서 얻어먹어라.”
그 이후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입춘 경에 통인이 다시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 발을 절면서 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통인이 이 무슨 변고인가 하면서 애를 태우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흙으로 만든 인형한테 말 발이나 절게 해서 얻어먹으라고 말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흙으로 만든 사람이 담 구멍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놈아, 너의 선생을 몰라보느냐?”
통인이 야단을 치면서 흙으로 만든 신상의 모가지를 툭 끊어버렸다. 그러자 피가 불끈 솟아나면서 쓰러져 죽어가던 말이 파릇파릇 살아났다.
통인은 신상의 목을 다시 붙여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원님 사또 출행할 때 말 발 절게 하지 말라. 대신 만민 백성들한테 소소하게 얻어먹으면서 살아라.”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광정당 앞에 이른 사람은 버선이나 헌 신발이라도 벗어던지면서 ‘이거라도 받아먹으면서 살라.’고 적선을 해야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진성기,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
이 신화는 광정당본풀이면서도 광정당신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흙을 빚어 만든 신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심풀이로 인형을 만들고 대수롭지 않게 넣은 주문이 이십 년이 지났을 때까지도 주술이 통하고 있었다니!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사극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사람을 죽게 할 목적으로 그를 대신하는 인형을 만들어놓고 바늘로 찌르며 저주를 걸던 장면이다. 몰입해서 보다가 끔찍해서 오소소 몸을 떨기까지 했다. 광정당본풀이를 읽으면서도 ‘아!’하는 순간의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끔찍해서가 아니라 신비로우면서도 유쾌하여 웃음이 터져 나오는 그런 떨림이었다.
덕수리 광정당에서 ‘흙으로 빚은 인형’ 에 대한 서사가 전해지는 것은 우연의 산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주도의 흙은 대부분 화산토여서 짓이겨 인형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덕수리에는 물에 이기면 점성을 띠는 흙이 많았다고 한다. 이 점토가 있었기에 덕수리의 불미공예가 성행할 수 있었다. 불미는 풀무의 제주어이다.
덕수리는 옛날 무쇠로 솥 등을 만드는 보습의 산지였고, 이 작업에 꼭 필요한 것이 점토이다. 전통방식의 풀무 작업은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 생활 도구들이나 농기구를 만들었다. 이렇게 흙을 이용한 덕수리의 불미공예는 현재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쇠를 녹여 농기구나 솥을 만드는 대장장이들은 도깨비를 조상신으로 모신다. 원래 도깨비당은 한경면 낙천리에 있었다. 도깨비당에서 모시는 신은 ‘송씨하르방’인데 낙천리의 설촌 조상이다. 송 씨의 생업이 솥을 만드는 불미였는데, 이후 송 씨 일가가 흙이 좋은 덕수리로 이주하면서 이곳에 보습 단지를 형성하였다.
여연
국어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으며, 현재 제주 신화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 등을 추억과 함께 담아낸 <제주의 파랑새>(도서출판 각), 제주의 마을길을 걸으며 신화와 만나는 <신화와 함께하는 당올레 기행>(알렙, 공저)과 <제주 당신을 만나다>(알렙, 공저),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르며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와 아이들이 제주신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학습으로 만나는 제주신화>(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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