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들, 그 중 먼지에 쌓여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햇살 아래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꼬닥꼬닥_마을신화]연재를 시작한다. 구술 채록된 제주 마을의 신화 가운데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도 하고 답사도 진행했다. 마을에 전해오는 신화를 공유하고 보전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신성성을 되찾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용궁아기씨가 좌정하고 있는 불목당. (사진=여연)
용궁아기씨가 좌정하고 있는 불목당. (사진=여연)

중문이 하로산또가 진궁부인과 부부 연을 맺은 후 딸아이가 태어났다. 딸아이는 천하일색으로 얼굴이 고왔지만 행실이 궂어서 부모 속을 썩였다. 한 살에 아버지 수염을 매고, 두 살에 어머니 젖가슴을 때리고, 세 살에 널어 둔 곡식을 흩어버리더니, 자라면서는 동네 어른들께 버릇없이 굴어 불목하게 만들었다. 

부모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일곱 살 된 딸을 무쇠상자에 들여놓고 마흔 여덟 통쇠로 채워 중문 바닷가 싱거물에 띄워버렸다. 무쇠상자가 물 아래로 삼 년, 물 위로 삼 년 하면서 아홉 해를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용왕 황제국 산호수 가지에 걸렸다.

용왕국의 삽사리가 내리 끙끙 짖어대니 용왕이 세 딸에게 손님이 왔는지 나가보라고 했다. 밖에 나가 살펴본 세 딸이 돌아와 산호수 가지에 난데없는 무쇠상자가 걸려 있다고 얘기했다. 용왕이 큰 딸에게 가서 내려오라고 하니 못하겠다고 고개를 돌리고, 둘째 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셋째 딸은 나가서 무쇠상자를 거뜬하게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옥같이 잘생긴 도령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중문이 하로산또의 딸이 사내 옷을 입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던 것이다. 

“너는 귀신인가 사람인가?”

“귀신이 어찌 이런 행색을 하고 있겠습니까? 저의 아버지는 중문이 하로산또이고, 어머니는 진궁부인입니다.”

“어찌하여 용왕국 산호수 가지에 걸렸는고?”

“일곱 살 나도록 버릇이 없어 죽으라고 저를 무쇠상자에 들여놓고 바다에 띄워버렸는데, 아홉 해를 떠다니다 용왕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용왕은 중문이 하로산또의 딸을 남자로 보고 셋째 딸과 혼인시켰다. 부부가 용궁을 떠나게 되니 용왕 부부는 딸과 사위에게 열두 가지 풍운조화 주머니를 내어주면서 그걸로 먹고 살라고 했다. 머리 아픈 것, 눈 아픈 것, 기미 종창 온갖 병을 다스리는 주머니를 받고 부부는 중문이 싱거물로 들어왔다.

하녀 느진덕이정하님이 물을 뜨러 싱거물에 갔다가 아기씨를 보고는 놀라 달려왔다.

“마님, 일곱 살에 죽으라고 바다에 던져버린 아기씨가 돌아왔습니다.”

“일곱 살에 말라 죽으라고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어찌 살아 돌아온단 말이냐?”

중문이 하로산또와 진궁부인은 자식이 아니라며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딸이 장인장모가 내어준 주머니를 풀어버렸다. 그러자 하로산또와 진궁부인의 눈이 폭삭 어두워지고 이도 아프고 귀앓이까지 하였다. 

“아이고, 아가야. 어서 이앓이 귀앓이 조화를 풀어다오.”

부모가 사정하자 딸은 다시 눈도 밝게 해 주고 이앓이 귀앓이가지 싹 다 낫게 해 주었다. 그러고선 용궁아기씨와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하였다. 중문이 하로산또와 진궁부인은 용궁 아기씨를 보고 어찌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딸이 방에 들어가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용얼래기로 머리를 빗어 연주댕기까지 하고 나섰다. 그제야 용궁 아기씨가 제 신랑이 여자임을 알아보고 발을 구르며 통곡하였다. 중문이 하로산또와 진궁부인은 사단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부부는 울고 있는 며느리가 딱하기 그지없었다.

“하도 행실이 궂어 죽으라고 바다에 띄웠더니 남자 행세로 이 사달을 만들었구나. 상황이 이러하니 내 아일 죽일 수가 있나 남의 아일 죽일 수가 있나.”

중문이 하로산또가 울고 있는 용궁 아기씨를 달래며 말했다.

“여자로서 우리 아이를 남자로 착각하여 속고 왔으니 네 신세가 참으로 가련하구나. 검북나무 아래 좌정하여 정월 열나흘 날 대제일을 받아라. 내 앞에 오는 단골들 너에게도 가게 해 주고, 나에게 제물 차려오듯이 너에게도 제물 챙겨 가도록 해 주겠다. 큰굿 할 때는 열두 석에 놀고, 작은 굿에는 아홉 석에 놀고, 앉은제에는 삼석에 놀게 해 주마.”

이리하여 용궁 아기씨는 불목당의 당신이 되어 단골들의 제를 받게 되었다. 

  (전통문화연구소, 『제주신당조사(서귀포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

도람지궤당 바로 앞 계곡. (사진=여연)
도람지궤당 바로 앞 계곡. (사진=여연)

옥 같은 도령과 혼인하고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여자였다! 용궁아기씨가 맞닥뜨린 기막힌 처지이다. 용궁아기씨의 불목당 신화는 송당의 아들과 혼인하고 따라온다는 송당계 서사를 차용하면서 일부 내용을 비틀어버린 셈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용궁아기씨를 데려왔을까? 바로 용궁아기씨가 가진 신의 권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용궁 아기씨는 해녀들이 안전을 지켜주면서, 피부병 등의 병증을 다루는 치병신이다. 또한 아이를 낳고 길러주는 산육신으로서의 권능도 갖추었다. 

용궁아기씨는 부모로부터 열두 가지 풍운조화 주머니를 받아가지고 왔다. 이 주머니들은 심방이면서 의사 역할을 겸했던 무의의 약주머니를 연상시킨다. 민속학자 문무병은 『제주도 본향당 신앙과 본풀이』에서 용왕황제국 셋째 따님인 용궁아기씨는 여자 무의의 신격화이며, 주술 도구가 약가루 주머니라고 했다.   

용궁의 셋째 공주는 불목당에 좌정하고, 중문이 하로산또와 진궁부인, 말썽을 피운 딸은 중문동 본향 도람지궤당에 좌정하였다. 도람지궤당은 깊은 계곡에 위치한 자연동굴인데, 도람지(박쥐)들이 서식할 것처럼 깊고 넓은 공간이다. 

도람지궤당 안은 태풍과 홍수 등으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사진=여연)
도람지궤당 안은 태풍과 홍수 등으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사진=여연)

 

도람지궤당이 있는 중문천은 천연기념물인 천제연 난대림 보호구역이다. (사진=여연)
도람지궤당이 있는 중문천은 천연기념물인 천제연 난대림 보호구역이다. (사진=여연)

도람지궤당은 중문동 본향으로 정월보름의 신과세제와 팔월보름의 마블림제를 열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심방이 서너 명의 악사들을 데리고 제법 규모가 큰 굿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밥도 장군, 힘도 장군인 본향당신을 청하여 마을의 액운을 막고, 귤과 벼의 수확이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용궁아기씨가 좌정하고 있는 불목당은 원래 굴무기나무가 많기 때문에 ‘굴묵당’이라 부르던 것이 ‘불묵당’이 되었다가 ‘불목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목당의 ‘불목’이 ‘不睦하다’, 즉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라는 한자어이다. 어쩌면 관계가 꼬여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부부의 처지를 꼬집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목당 바로 앞은 4차선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했다. (사진=여연)
불목당 바로 앞은 4차선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했다. (사진=여연)

 

여연

국어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으며, 현재 제주 신화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 등을 추억과 함께 담아낸 <제주의 파랑새>(도서출판 각), 제주의 마을길을 걸으며 신화와 만나는 <신화와 함께하는 당올레 기행>(알렙, 공저)<제주 당신을 만나다>(알렙, 공저),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르며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와 아이들이 제주신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학습으로 만나는 제주신화>(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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