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들, 그 중 먼지에 쌓여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햇살 아래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꼬닥꼬닥_마을신화]연재를 시작한다. 구술 채록된 제주 마을의 신화 가운데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도 하고 답사도 진행했다. 마을에 전해오는 신화를 공유하고 보전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신성성을 되찾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는다. 

북촌 가릿당 당집. (사진=여연)
북촌 가릿당 당집. (사진=여연)

어느 날부터인가 북촌 마을에 변고가 생기기 시작했다. 밤에는 신불이 타오르고, 낮에는 연불이 피어올라 사방에 연기가 자욱했다. 난데없이 옥퉁소 소리, 피리 날라리 소리, 비비둥둥 비비둥둥 끊이지 아니하고, 천둥 번개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풀 뜯기러 산에 올려 보낸 소와 말이 이유 없이 탕탕 죽어나가더니, 마을 어른들도 풍을 맞아 쓰러졌다. 갓난아기까지 경증을 일으키면서 정신을 잃으니 모두들 근심이 가득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

“함덕도 볕이 나고 동복도 볕이 나 짱짱하니 날만 좋은디, 우리 마을은 어떵허연 밤낮으로 비바람에 날벼락이우꽈? 동네 어른 쓰러지고 농사도 망해가난 살아갈 방도가 없수다.”

“어디 산에 묘라도 잘못 써신가? 아니면 우리 마을에 큰스님이라도 들어와신가?”

“마을에 대사가 들어왔다고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때 청년들이 나서서 말을 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고, 가릿당 쪽에서 천둥소리, 옥퉁소 거문고 소리가 나는 것이우다.”

“천둥소리는 하늘에서 나는 것이지 어찌 거기서 오겠는가?”

“혹시 모르난 우리 청년들이 가서 둘러보고 오쿠다.”

청년들이 가릿당 쪽으로 몰려가 이리저리 살피는데, 또 다시 피리 퉁소 거문고 소리가 귀에 쟁쟁하였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밤하늘에 불꽃이 초롱초롱 걸리더니 웬 백발노장이 긴 수염을 날리면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발노장이 청년들을 보고 삼각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하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저희들은 뒷개(북촌 마을) 사는 청년이옵니다. 우리 마을에 변고가 끊이지 않으니 연유를 찾고자 이리 왔습니다.”

“때는 이미 늦었으니 썩 물러가라.”

청년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자, 백발노장이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내 자손에 재앙을 내리는 것은 내 잘못이로다. 허나 내가 여기 며칠 동안이 머무르고 있었는데도 모두들 나를 본체만체 하였느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얼 알 수 있겠습니까? 몰라 뵈었으니, 부디 용서해 주십서.”

“알았다. 그러면 지금 당장 아픈 아이고 죽어가는 사람이고 모두들 데리고 오너라.”

청년들이 마을 어른들께 달려가 사실을 전하고 아픈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 가릿당으로 데려갔다. “모두 다 엎드려라!”

아픈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리자 백발노장이 손을 들어 나쁜 기운 거두어들이고 말끔히 낫게 해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내력을 이야기했다.

“나는 손당 백주또 소천국의 아홉째 아들이노라. 뒷개에 가서 마을을 보살피라는 옥황상제와 오백장군의 명을 받아 내려왔는데 모두들 무관심하니 화가 나서 모진 광풍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허나 앞으로는 모두들 평안해질 것이니 걱정 말아라. 앞으로 갈 길이 더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엎드리고 사죄를 하였다.

“밥 먹으면 배부른 줄 알고, 옷 입으면 등 따순 줄 아는 인간이 어찌 철이 있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나는 저 구지모를로 가서 천리를 보고 만리를 볼 것이다. 앞으로 열두시만곡 모든 곡식을 거두어드리게 농사를 많이 지어라. 어장에 물고기도 많이 잡아들이도록 하라. 마소도 많이 길러라. 오곡풍성하게 하고 소와 말 번성시키고, 자손들도 잘 되게 해 줄 것이다. 정월 열나흘 날, 무사태평 기원하는 신년과세제 올리고 섣달그믐 날 송년제를 잊지 말아라. 강남천자국에서 영등대왕 영등할망 제주 산 구경 물 구경 올 것이니 이월 열사흘 날 영등대제를 올리면 소라 씨 전복 씨 듬뿍듬뿍 뿌려줄 것이다. 인간 목숨 차지한 저승 열시왕 청해서 거도청제를 올리면 명도 잇도 복도 이을 수 있다. 칠월 열나흘 날 마불림제를  챙겨야 말이며 소들을 잘 몰아다줄 수 있을 것이다.”

북촌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며 정성을 다하고, 한집님께서 지켜주시니 마을이 날로 번성하였다. 

(‘현용준, 『제주도 무속자료사전』, 도서출판 각’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

당팟당이 있는 당구들동산의 팽나무들. (사진=여연)
당팟당이 있는 당구들동산의 팽나무들. (사진=여연)

가릿당본풀이는 시작부터 마을에 쏟아지는 온갖 재앙들로 분위기가 살벌하다. 어른들이며 아이들이 쓰러지고, 소와 말까지 탕탕 죽어나가니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한다. 바로 옆 마을 함덕도 동복도 조용한데 북촌만 풍운조화가 그치지 않고 변고가 잇따르는 것은 결국 신을 제대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 그 신께서 챙기라고 하는 제일들은 어찌도 그리 많은가. 줄줄이 열거하는 제일들을 제대로 챙길 수나 있었을까 슬그머니 걱정 될 지경이다. 가난한 살림에 시도 때도 없이 제사상을 차렸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부터는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야 했다. 친척들이 돌아가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하면 어느덧 새벽 두 시를 넘기기 일쑤여서, 제사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혼자 구시렁거렸다. 

나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어머니는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조상을 잘 모시면 은덕을 베풀어주시리라는 믿음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릿당본풀이에서도 북촌 마을 사람들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신의 분노와 줄줄이 이어지는 당제는 마을에 불어 닥친 참상을 이겨내고자 하는 삶의 의지이자 열망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가릿당 신화를 읽으며, 이 마을이 겪었던 4·3의 고통이 떠올랐다. 1949년 1월 17일부터 고작 이틀 동안에 마을 주민 400여 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마을에서 경찰 2명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람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하고 총을 쏜 것이다. 북촌사건은 제주 4·3 기간 중 발생한 큰 참상 중 하나이다. 

북촌초등학교 옆 ‘너븐숭이4‧3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마을길을 걸어보라. 정성이 가득한 집 정원들과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 언덕 위 울창한 팽나무, 깔끔하게 정비해놓은 역사 유적지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놔 둔 곳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공동체의 노력과 정성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경건해지는 마을, 그곳이 북촌이다.
 

북촌의 어느 집 정원. (사진=여연)
북촌의 어느 집 정원. (사진=여연)
북촌 포구와 마을 풍경. (사진=여연)
북촌 포구와 마을 풍경. (사진=여연)

 

여연

국어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했으며, 현재 제주 신화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 자연 등을 추억과 함께 담아낸 <제주의 파랑새>(도서출판 각), 제주의 마을길을 걸으며 신화와 만나는 <신화와 함께하는 당올레 기행>(알렙, 공저)<제주 당신을 만나다>(알렙, 공저),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르며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와 아이들이 제주신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학습으로 만나는 제주신화>(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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