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곶자왈 생태탐방 숲길. (사진=고은희 '길에서 만난 들꽃이야기' )
화순곶자왈 생태탐방 숲길. (사진=고은희 '길에서 만난 들꽃이야기' )

한라산에서 아홉 형제가 솟았으니 이들을 ‘하로산또’라 부른다. 아홉 형제는 아홉 마을의 모심을 받고 각 마을의 본향신이 된다. ‘화순곶자왈’을 끼고 있는 안덕면 상창리에 좌정한 여덟 번째 ‘하로산또’는 다소 긴 이름을 갖고 있다. ‘남판돌판 고남상태자 하로산또’... ‘고남상태자’는 ‘꽃나무 상태자(上太子)’를 말하는 것이고, ‘남판돌판’은 ‘나무판 돌판’이란 말이다. 그럼 ‘나무판 돌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제주에는 마을 이름이 ‘세화’인 곳이 두 군데 있다. ‘구좌읍 세화리’와 ‘표선면 세화리’. 두 ‘세화’는 한자 표기 또한 같다. ‘細花’. 뜻을 풀이하면 ‘가는 꽃’. 가느다란 꽃? 무슨 말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제주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언작화’(藪諺作花). ‘수’(藪), 즉 ‘숲’을 언문으로 ‘화’(花)라고 부른다. 언문은 한글, 우리말이다. 

‘화’(花)의 우리말은 무엇인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몸짓에 불과한 그것, 바로 ‘꽃’이다. 그러니까 제주에선 ‘숲’을 ‘꽃’이라 불렀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된소리가 약했으니 ‘꽃’보다는 ‘곶’이라 불렀을 것이다. ‘구좌읍 세화리’나 ‘표선면 세화리’의 옛 지명은 모두 ‘고는 곶’이다. 그래서 한자 표기가 둘 다 ‘細花’인 것이다. 그러니까 ‘細花’는 ‘가는 꽃’이 아니라 ‘고는 곶’, ‘가는 숲’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는 숲’은 또 무슨 뜻일까? 

‘곶자왈’. 제주의 숲을 이르는 말이다. 제주의 옛 어른들은 그냥 ‘곶’이라 불렀다. ‘암반 위에 형성된 숲’, 이것이 ‘곶’에 대한 생태적 개념이다. 곶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자. 대략 1만 년 전 여러 오름에서 용암이 분출한다. 용암은 대지를 뒤덮고 해안까지 흘러내린다. 뜨거운 용암이 급속히 식으면서 표면은 갈라지고 최종적으로 울퉁불퉁, 균열이 심한 암반이 된다. 

곶자왈 자료사진.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곶자왈 자료사진.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암반의 틈 사이로 나무 씨앗이 발아하여 현재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 크고 작은 용암이 누대에 걸쳐 분출하면서 다양한 폭과 길이의 암반이 형성되었다. 그중 폭이 좁고 긴 암반에 이루어진 숲을 ‘가는 숲’, 즉 ‘고는 곶’이라 부른 것이다. ‘화순곶자왈’을 끼고 있는 마을, 상창리에 좌정한 ‘남판돌판 고남상태자 하로산또’. 

여기서 ‘남판돌판’은 용암 위의 숲, ‘곶’에 대한 정확한 생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의 ‘곶’에 대한 이해는 생태적 개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곶’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제주의 숲은 암반 위에만 있는가?’ 

조선시대 제주도의 토지 사용 현황을 보자. 해발 600m 이상은 한라산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하자. 해발 150m~600m는 국마장(國馬場)이다. 해안부터 150m까지는 백성의 땅이다. 전체 토지의 30%를 차지하는 국마장은 오름을 포함한 전체가 목초지였다. 

제주는 땅이 척박하여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하여 백성의 땅도 가옥과 농지를 제외한 곳은 대부분 목초지였다. 국마장은 말(馬)을 위해, 말에게 땅을 빼앗긴 백성은 소(牛)를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목초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럼 ‘곶’은 어떤가? ‘곶’은 암반 지대이기에 개간이 어려워 농지나 목초지 활용이 불가능하였다. 하여 ‘곶’이 숲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주의 숲은 암반 위에만 있는가?’라는 질문을 과거형, ‘과거 제주의 숲은 암반 위에만 있었나?’라고 바꾸면 ‘그렇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 해발 600m 이상 한라산은 제외라는 것은 잊지 말자. 

대정읍 구억리에 있는 ‘구억초등학교’는 4·3의 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던 4.28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이곳이 협상 장소로 선택되었던 이유는 구억리가 무장대의 은신처인 ‘한경곶자왈’에 인접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한경곶자왈'은 8개의 마을이 붙어 있다. 물론 마을마다 곶자왈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동그라미 속의 밭은 '한경곶자왈'의 일부인 '신평곶자왈'에 붙어있는 밭이다. '구각전'은 아마도 이런 밭과 비슷할 것 같다. (사진=고승욱)
'한경곶자왈'은 8개의 마을이 붙어 있다. 물론 마을마다 곶자왈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동그라미 속의 밭은 '한경곶자왈'의 일부인 '신평곶자왈'에 붙어있는 밭이다. '구각전'은 아마도 이런 밭과 비슷할 것 같다. (사진=네이버 지도 갈무리)

구억리는 옹기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 면적 절반 이상이 ‘곶’이었기에 땔감 걱정 없이 옹기를 구울 수 있었다. 또한 구억리 목자(牧者)들은 ‘곶’에 소를 풀어놓아 키우기도 했다. 구억리의 ‘곶’은 난대성 숲이기에 소들이 여린 나뭇잎을 뜯어 먹으며 겨울을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생업은 구억리 밭의 낮은 생산성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밭의 열악함 때문에 구억리는 제주옹기가 종언을 고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옹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억리의 옛 이름은 ‘구석밭’이다. 대정읍 북쪽 끝, ‘곶’의 구석에 붙은 마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구석밭’에는 ‘구각전’(九角田)이라는 밭이 있다. 말 그대로 ‘아홉 개의 구석이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밭은 사각형일 거라는 상식에 도전하는 이 ‘구각전’은 어떻게 생긴 밭일까? 

나는 ‘구각전’이라 불리는 밭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궁금하여 ‘구글 맵’으로 찾아보았다. 내가 찾은 밭이 ‘구각전’인지는 모르겠으나 ‘구각전’과 비슷한 밭이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퉁이가 여럿이다. 그 이유는 꼬불꼬불한 용암의 경계를 따라 밭을 일군 결과였다. 

‘구각전’의 놀라움은 밭 하나에 있지 않았다. 용암의 경계를 따라 일구어낸 수많은 ‘구각전’들을 하나로 놓고 볼 때 놀라움의 실체와 만날 수 있었다. 밭 주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밭을 용암의 경계 끝까지 밀어붙였다. 

직선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과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하는 농사꾼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 곶은 6000년 전 바다를 향해 흘러내린 용암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땅이 귀한 곳은 세계 어디에나 제주의 ‘구각전’과 비슷한 밭이 있었다. ‘구각전’은 제주인만이 아닌 세계 만민의 보편적 의지 속에서 자연의 웅숭함과 깊이 만나고 있었다.

눈이 싱글싱글해진 엄마는 ‘예쁘다’를 연발한다. 엄마의 놀란 표정을 바라보던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돌이끼를 만져본다. 처음 만져보는 이끼의 느낌이 어리둥절한 듯 아이는 엄마를 쳐다본다. 아이의 눈동자에 엄마의 미소가 맺힌다. 아이는 자신에게만 하던 엄마의 말, ‘예쁘다’를 부드럽고 촉촉한 그 어리둥절함 속에서 배우는 중이다. 

과거 곤궁했던 사람들에게 땔감을 주고, 추운 겨울 소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곶자왈은 이제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새가 열매를 찾고, 다람쥐가 도토리를 찾듯, 사람들은 곶자왈에서 자기만큼의 위안과 희망을 찾는 듯하다. 곶자왈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후드득 쏟아진다. 모두 환한 표정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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