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추사의 세한도는 조선 문인화 중 최고의 그림으로 상찬 받고 있습니다. 세한도는 문인화적 가치와 더불어 고증학적 가치도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고난 운 또한 범상치 않습니다. 당대 청나라 문사 16인으로부터 찬사의 글을 받았다는 점, 일제 말기 세한도 소장자의 집이 동경 폭격으로 불타기 직전 세한도가 손재형에 의해 무사히 한국으로 귀환했다는 점. 이러한 우여곡절이 세한도의 본래 가치에 덧대어져 세한도를 더욱 보배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한도. 추사 김정희 작.
세한도. 추사 김정희 작.

난대성의 관점에서 세한도에 대한 저의 안타까움은 세한도에 제주가 없다는 점입니다. 송백(松柏)이 그려져 있으나 그것은 지조(志操)를 사의(寫意)한 것입니다. 세한도가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려졌다 해도 송백은 바로 그 자리에 그려졌을 것입니다. 하기사 내면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 제주를 찾는 것은 어찌 보면 연목구어이겠죠. 

추사체가 제주에서 완성되었다는 말은 이제 정설이 된 듯합니다. 하지만 추사의 개인적 고독과 예술에 대한 열정만 언급하고 있을 뿐 추사체와 제주의 관계에 대한 글은 만나기 어렵습니다. 추사가 8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주를 겪었음에도 말입니다.

추사는 제주 유배 동안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추사는 편지를 통해 온갖 풍토병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는 제주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격하게 반응한 것이 추사의 몸이었음을 확인해 줍니다. 추사가 남긴 글 속의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따라가다 보면 추사체에 깃든 제주의 난대성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가에게 몸만큼이나 민감한 것이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7. 다음은 추사가 대정으로 유배 가던 첫날의 기록입니다. 

“밀림이 무성한 그늘 속을 지나는데 겨우 한 가닥 햇빛이 통할 뿐이나 모두 아름다운 나무로서 겨울에도 푸르러 시들지 않고 있었다” 

관덕정에서 ‘저지’를 거쳐 ‘대정’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신평곶자왈(한경곶자왈 지대의 일부)을 지나야 합니다. 추사는 이곳을 지나면서 겨울에도 푸른 숲이라며 곶자왈의 핵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추사의 1·2차 적거지는 ‘안성리’로 신평곶자왈에서 걸어서 1시간 거리의 마을입니다. 마지막 3차 적거지 ‘창천리’는 안덕계곡을 끼고 있는 마을입니다. 안덕계곡 또한 곶자왈의 난대성 식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곶자왈은 그냥 난대성 숲이지만, 선비의 눈엔 겨울에도 푸른 지조의 숲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곶자왈을 추사가 소요하지 않았으리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온갖 나무가 우거진 곶자왈은 추사가 경험했을 소나무 숲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었을 겁니다. 

추사 적거지에서 바라본 ‘바굼지오름’(단산)입니다. 오름 오른편 언덕을 넘으면 대정향교가 있습니다.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았다고는 하나, 추사는 대정향교에서 제주 유생들을 사사했으며, 한라산을 등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도 남긴 것으로 미루어 제한적이나마 나름의 자유를 누렸을 거라고 많은 연구자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2023년 1월. (사진=고승욱)
추사 적거지에서 바라본 ‘바굼지오름’(단산)입니다. 오름 오른편 언덕을 넘으면 대정향교가 있습니다.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았다고는 하나, 추사는 대정향교에서 제주 유생들을 사사했으며, 한라산을 등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도 남긴 것으로 미루어 제한적이나마 나름의 자유를 누렸을 거라고 많은 연구자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2023년 1월. (사진=고승욱)

추사는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귤중옥(橘中屋)이라 지으며 다음의 글을 남겼습니다.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은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 빛깔은 푸르고 누런데, 우뚝한 지조와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나는 그로써 내 집의 액호를 삼는다.” 

지조만의 송백이 아닌, 지조와 덕을 겸한 귤나무입니다. 몸으로 느낀 제주의 풍토가 추사의 정신 속에 자리 잡는 순간입니다. 추사의 1·2차 적거지에서 대정향교로 가는 길목에 바굼지오름이 있습니다. 추사 전기를 쓴 유홍준의 감상처럼 “기름기가 빠지고 뼛골이 느껴지는” 딱 그런 오름입니다. 

대정향교를 오가려면 바굼지오름의 낮은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한라산 중턱에서 시작된 신평곶자왈이 보입니다. 신평곶자왈은 마치 바다를 향해 돌진하는 이무기가 바닷물에 머리를 처박듯 모슬포 앞바다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날, 먼발치의 검푸른 이무기를 바라보면서 추사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가시낭, 반두어리, 신남, 조베낭, 담팔수, 송악과 온갖 잡목들이 기괴하게 어우러진 이무기의 내장 속 향연을 감상하며 추사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추사의 적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원(조선시대 귤 진상을 위해 관이 관리하던 과수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추사가 봤던 귤나무들은 지금의 귤나무처럼 키가 작았을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제주의 귤 진상은 고려 시대 때 시작되었다고 하니 고려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의 과원엔 수령이 오래된 귤나무도 많았을 겁니다. 위의 사진은 조선시대 때 과원으로 추정되는 해안동 과수원에 있는 300년 수령의 ‘산물낭’이고, 아래 사진은 화순에 있는 100년 수령의 ‘댕유지’입니다. 모두 제주 토종 귤나무입니다. 2023년 1월. (사진=고승욱)
추사의 적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원(조선시대 귤 진상을 위해 관이 관리하던 과수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추사가 봤던 귤나무들은 지금의 귤나무처럼 키가 작았을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제주의 귤 진상은 고려 시대 때 시작되었다고 하니 고려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의 과원엔 수령이 오래된 귤나무도 많았을 겁니다. 위의 사진은 조선시대 때 과원으로 추정되는 해안동 과수원에 있는 300년 수령의 ‘산물낭’이고, 아래 사진은 화순에 있는 100년 수령의 ‘댕유지’입니다. 모두 제주 토종 귤나무입니다. 2023년 1월. (사진=고승욱)

 

8. 이하응(흥선 대원군)이 파락호 행세를 하던 젊은 시절 자신이 그린 묵란을 추사에게 보내고 품평을 부탁했습니다. 추사가 보낸 품평문에는 화품(畫品)에 지름길은 없고 부단한 노력이 중하다고 하면서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구천구백구십구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하나가 가장 이르기 어렵습니다. 구천구백구십구는 거의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하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힘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붙잡기 힘든 그 하나를 동양예술에서는 무위(기운, 천기, 신격)라고 표현하였고, 인위(언어, 지식, 법)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라고 인식했습니다. 추사의 수많은 작품 중 구천구백구십구에 하나를 더해 일 만에 이른 작품이 있습니다. ‘불이선란도’입니다. 추사는 이 작품을 완성한 후 스스로도 놀랐는지 그림에 관한 글을 네 번이나 쓰며 기뻐했습니다. 

'불이선란도' 추사 깅정희 작. 오른쪽은 포토샵으로 글씨를 지운 이미지입니다.
'불이선란도' 추사 깅정희 작. 오른쪽은 포토샵으로 글씨를 지운 이미지입니다.

추사의 글 중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偶然寫出性中天

此是維摩不二禪 

우연히 그렸는데 성중천이 드러났네 

이게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로구나

只可有一, 不可有二 

오직 한 번만 가능하고 두 번은 불가능하다

추사가 말하는 오직 한 번만 가능한 불이(不二)의 경지는 무엇일까요? 나와 대상의 일치? 나와 세계의 일치? 
 

9. 미국에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이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기법으로 ‘추상표현주의’라는 장르를 만든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에서 피카소와 동급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폴록이 작업하는 장면.
폴록이 작업하는 장면.
'Blue Poles, Number 11' 잭슨 폴록 작. 1952년
'Blue Poles, Number 11' 잭슨 폴록 작. 1952년

10년 전쯤인가 생전 처음 곶자왈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잭슨 폴록의 그림이었습니다. 얼기설기 우거진 곶자왈의 첫인상은 기괴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곶자왈은 조화로운 전체로 나에게 다가왔고, 어떤 생명의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선흘곶. 2016년 12월. (사진=고승욱)
선흘곶. 2016년 12월. (사진=고승욱)

 

곶자왈에서 느낀 그 생명성이 다시 폴록의 그림으로 되돌아가 난해한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폴록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림 속에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허용할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면 결과는 엉망으로 나타나고, 그림과 나 사이에 주고받는 조화로운 관계가 성립되면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준다.”

폴록은 그림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나와 그림이 하나가 될 때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합니다. 폴록이 말하는 그림은 뭐고 그림의 생명은 뭔가요? 그림을 ‘또 다른 나’라고 상정하고, 그림 그리는 행위를 ‘또 다른 나’가 드러나는 장이라고 가정해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그림은 인위를 따라야 하는 나와 무위로 살고자 하는 내가 만나는 장이 됩니다. 폴록은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그림이 된다고 합니다. 불이입니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추사의 불이는 나와 대상이 하나 되는 불이이기 이전에 나와 내가 하나 되는 불이입니다. 

구천구백구십구개의 사슬로 구속된 내가 단 하나의 빗장 풀린 나와 포옹하는 불이입니다. 이 지점에서 추사가 이하응에게 보낸 품평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힘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10. 추사는 서예에서 법고창신(法鼓昌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법고도 어렵지만 창신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창신이 어려운 것은 개인의 무능 때문이 아닙니다. 과거 규범에 매인 유교가 창신의 동력인 개성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같은 시기 서양미술에서도 나타납니다. 다비드(Jacques-Louis David)로 대표되는 유럽의 신고전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법고로 삼고 인상주의의 창신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조류는 점진적으로 변하였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한 추사는 2000년 서예사에서 준봉(峻峯)을 이루었습니다. 개인의 탄생이라는 정신사적 지평에서 추사의 글씨는 베토벤의 음악과 고흐의 그림과 동시대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작, 1787년.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작, 1787년.

영, 정조 연간에 공보다 사를 추구하는 패관문학(稗官文學)이 성행했습니다. 유교적 대아(大雅)를 추구하던 추사는 이러한 사의 개성을 괴(怪)하다고 비판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주 유배 후엔 달랐습니다. 자신의 글이 괴하다는 평을 들은 추사는 “구양순은 괴하고 저수량은 아름답다”, “구양순도 괴를 면치 못했으니 구양순과 더불어 괴하다고 불린들 두려워할 게 뭐 있으리오”라고 말했습니다. 

‘괴’의 발로는 ‘개성’이고 ‘개성’의 발로는 ‘자의식’이고, ‘자의식의’ 발로는 ‘자아 분열의 경험’입니다. 베토벤은 난청 때문에, 고흐는 사회의 몰인정 때문에 자아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추사는 어땠을까요? 

왕실의 척족이었던 추사는 당대 최고 금수저 엘리트였습니다. 경학(經學)의 적자요, 북학(北學)의 기린아요, 금석학(金石學)의 비조였습니다. 하지만 추사는 교만하다는 이유로 탄핵받았고, 결국 당쟁의 밀려 유배의 벼랑으로 추락했습니다. 

추사는 오랜 유배객의 처지를 한탄하며 하늘을 향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물었습니다. 지조와 덕이 겸하길 바라며 지었지만 귤중옥이라는 이름은 자신을 향한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으로 분열되었을 겁니다. 

 

11. 오늘도 그놈이 나타났다. 잊고 있던 그놈은 곶자왈 초입을 지날 때 어김없이 나타난다. 잊으려 할수록 또렷해지고 억울해할수록 단단해지는 그놈이다. 나는 어쩌다 이리되었나. 과거 영광 속에서 함께 웃던 벗들은 다 어디로 갔나. 너로 인해 추락한 나는 이제 헐벗은 자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정말 잘못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이 죄의 인정일까? 죄의 인정은 깊은 곳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연다. 온갖 죄들이 상자 밖으로 뛰쳐나와 나의 멱살을 잡는다. 기억하지도 못할 죄들은 까마득한 과거의 현장으로 나를 끌고 간다. 분노의 현장에서 그들은 모두 내 교만의 희생자들이다. 모래알 같은 죄들이 온 세상의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바닥을 긴다. 

잠시 고요해지더니 다시 무서운 발소리가 난다. 또 다시 그놈일까? 마지막 피해자의 등장일까? 나는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곁눈질한다. 누구인가? 그놈은 그놈이 아니다. 그놈은 바로 나다.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몰아붙이는 나. 거친 손으로 나의 목을 조르는 나. 나는 비명을 지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곶자왈이다. 환상이었을까? 내 목을 조르던 그놈은 무엇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 나의 나약함일까? 나의 비루함일까? 그놈 얼굴인지 내 얼굴인지 온갖 얼굴이 얼기설기 뒤엉킨 곶자왈이 나를 쳐다본다. 헐벗은 나의 절망을 불살라버리려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주시한다.

 

12. 추사는 곶자왈만 본 것은 아닐 겁니다. 한라산과 오름을 보았고, 태풍과 파도와 억새를 보았고, 풀벌레와 반딧불을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헐벗은 자에게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까요? 검은 흙을 파먹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제주 백성들의 삶 앞에서 자신의 절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절감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작은 새가 폭풍우에 몸을 숨기듯 번민하는 자의 마음엔 아름다움이 머물지 못합니다. 잔잔한 호수는 자신을 찾아온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은빛 물결을 내어줍니다. 자신을 용서하려 애쓰는 자의 내면은 때로 호수처럼 잔잔했을 겁니다. 

추사에게 예술은 유교에 의해 버려졌음에도 유교를 버릴 수 없는 자가 붙잡아야 했던 마지막 동아줄입니다. 치국평천하라는 먼 길을 거슬러 다시 되돌아가야 했던 수신의 길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용을 욕망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그 길에서 비범과 범속은 투쟁하고 의와 덕은 위로합니다. 이런 힘으로 추사체가 완성됐다면 추사체 한 획 한 획 속에서 제주의 검은 풍토와 제주백성의 하얀 웃음을 찾으려는 저의 기대는 접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판전' 추사 김정희. 봉은사 현판을 탁본한 것입니다.
'판전' 추사 김정희. 봉은사 현판을 탁본한 것입니다.

서울 봉은사에는 추사의 글 ‘판전’이 있습니다. 늙은 고목에 돋은 싹도 어린나무의 싹처럼 싱그러운 법인가 봅니다. 이 글 속에서, 늙은 추사의 메마른 손이 어린 추사의 따뜻한 볼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벌써 도착한 슬픔이 오래전 기쁨과 첫인사의 마지막 예를 나누고 있습니다. 추사는 이 글을 쓰고 3일 후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끝)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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