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뚜라미가 우네요. 내일 아침 듣게 될 아나운서의 멘트 같지만,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입니다. 가을은 대기가 건조하기 때문에 하늘이 맑아 천고하다고 합니다. 마비는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기보다는 말이 살을 찌워야 하는 계절이란 뜻이겠죠. 추운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뭇짐승들에게 가을은 에너지 보충을 위한 라스트 챤스이니까요. 너무 따졌나요? 귀뚜라미가 웃네요..

가을은 뭐니 뭐니해도 단풍의 계절입니다. 안타깝게도 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엔 단풍이 없습니다. 어릴 때 그림을 곧잘 그렸는데 이상하게도 가을 단풍을 그렸던 기억은 없습니다. 제가 둔감해서 그런 건지, 고향이 따듯한 서귀포여서 그런 건지, 가을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던 건지..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를.. 한때 유행했던 시가 떠오르긴 하지만 이는 낙엽의 가을이지 단풍의 가을은 아니네요. 단풍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대형 카렌다의 10월 단풍 사진인 것 같습니다. 실제 단풍에 대한 기억은 고등학생이 되어 한라산을 오르면서였겠지만, 한라산의 단풍은 달력 사진 속 단풍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진은 가짜라는 인식이 아마 그때 처음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참 후의 일이지만, 우연히 가을 내장산을 간 적이 있습니다. 단풍을 보았습니다. 사진보다 예쁜 단풍을 그때 처음 봤던 것 같습니다. 이게 빨간색인지 빨간빛인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군요. 다시 한참이 지난 후 제주의 가을 단풍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내장산 단풍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제주 단풍은 이상하게도 칙칙해 보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일교차가 어떻고, 습도며 기온이 어떻고 이리저리 따져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한라산 영실의 가을 풍경. (사진=고승욱)
한라산 영실의 가을 풍경. (사진=고승욱)

 

2. 해녀들이 물질하는 제주 바다는 검은 돌과 하얀 모래로 이루어졌습니다. 용암은 검게 굳어 울퉁불퉁한 골과 마루를 만들었고, 파도에 부서진 조개 껍질은 하얀 모래가 되었습니다. 암초지대에 드문드문 모래가 모여 있으면 ‘모살통’이라 부르고, 모래지대에 띄엄띄엄 암초가 있으면 ‘지미’라 부릅니다. 하얀 얼굴에 ‘기미’가 낀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부르나 봅니다. ‘기미’를 제주사람들은 ‘지미’라 부르거든요. 

옛 해녀들은 해삼을 ‘미’라고 부릅니다. 사월 미는 사둔칩에 가져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수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해삼은 자취를 감춥니다. 겨울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해삼은 여름에 여름잠을 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력 4월에 잡은 귀한 해삼이 사돈집 선물로 가게 되는 거죠.

해삼은 모래와 뒤섞인 유기물을 먹기 위해 모래를 찾고, 몸을 숨기고 새끼를 낳기 위해 암초를 찾습니다. 그래서 ‘미’는 ‘모살통’이나 ‘지미’에 많습니다. ‘미’는 유기물을 모래와 함께 먹고 새끼손가락만 한 하얀 모래 똥을 흘리며 다닙니다. 해녀들이 ‘모살통’이나 ‘지미’ 주변에서 하얀 똥을 찾는 것은 ‘미’, 해삼을 잡기 위함입니다. 모래가 많은 세화 바닷속에 있는 ‘지미’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미나는지미’, ‘미’가 많이 나서 그리 이름을 붙였겠죠?

제주시 구좌읍 세화 앞바다. (사진=네이버 지도 갈무리)
제주시 구좌읍 세화 앞바다. (사진=네이버 지도 갈무리)

 

3. 제주는 태풍의 길목에 있습니다. 해마다 적도 부근에서 20여 개의 태풍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중 제주에 영향을 끼치는 태풍은 평균 서너 개라고 하네요. 막을 수 없는 태풍은 대비가 최선입니다. 농작물이야 농사꾼의 노심초사가 어찌 막아본다지만, 나머지 식물과 한라산의 나무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입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나무들은 상처투성입니다. 뿌리째 뽑히거나 가지가 부러집니다. 성한 가지도 온전치 못합니다. 나뭇가지에 부딪히고 서로 부딪힌 잎들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여름 태풍에 난 상처는 금세 아물지만, 가을 태풍엔 아물 새가 없습니다. 기온이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지면 푸른 잎은 물들지만 푸른 상처는 타들어 갑니다. 

한여름 태양이 하얀 얼굴에 ‘지미’를 새기듯 가을 태풍이 예쁜 단풍에 ‘지미’를 새겼습니다. ‘지미’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풍을 견뎌낸 나뭇잎 하나하나마다 바다만큼의 ‘지미’가 있었습니다. 그 나뭇잎이 모여 나무가 되고, 나무가 모여 숲이 되고, 숲이 모여 늙어진 할망 얼굴에 핀 ‘지미’처럼 가을 한라산이 된 것입니다. 

이제, 태풍이 비껴간 내장산 단풍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세파를 견뎌낸 얼굴은 애잔하고 태풍을 견뎌낸 단풍은 묵직합니다. 반증 되어도 간직하고픈 저의 추정입니다.

가을 태풍이 예쁜 단풍에 지미를 새겼다. (사진=고승욱)
가을 태풍이 예쁜 단풍에 지미를 새겼다. (사진=고승욱)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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