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 네 상착 부러지면 선흘곶디 곧은 남이 없을쏘냐”
‘해녀 노 젓는 소리’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네’는 ‘노’, ‘상착’은 노의 상단 부분, ‘곧은 남’의 ‘남’은 ‘나무’를 말합니다.
‘서거미오름’(거문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은 동쪽으로 흘러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를 만들었고, 서쪽으로 흘러 ‘선흘곶’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선흘곶은 현재 동백나무로 유명하지만, 과거 선흘곶의 우점종은 ‘곧은 남’, 난대성 교목이었습니다. 그중 가시낭(가시나무)은 오래 전부터 선흘곶의 터줏대감이었습니다.
다음은 고광민 선생께서 들려주신 선흘곶 가시낭과 제주 잠대(쟁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주 나무 중 단단하기로는 굴무기(느티나무)가 최고지만 농기구 제작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돌밭을 갈아야 하는 잠대의 목재는 단단함만으로는 안된다. 충격에 강한 잠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함과 더불어 탄력성 있는 목재가 필요하다.
섬유질이 풍부한 가시낭이나 솔피낭(쇠물푸레나무)은 단단하면서도 탄력성이 뛰어났기에 잠대 제작에 없어서는 안 될 목재였다. 선흘곶은 가시낭이 풍부했다. 선흘 사람들은 선흘곶 가시낭으로 잠대를 만들었다. 선흘 잠대는 가시낭이 드물었던 제주 서촌으로 팔려나갔다.”
4. 가시나무는 제주말 가시낭이 표준어로 정착된 이름입니다. 가시낭의 나뭇가지는 매끈합니다. 나뭇가지에 가시가 전혀 없는데도 가시나무라 부릅니다. 왜 그런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합니다. 유력한 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동일한 수종의 나무를 가시(ガシ)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36년간 일제의 속국으로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몰맹진 상상을 한 번 해보려 합니다.
나뭇잎 가장자리는 톱니처럼 생겼습니다. 이것을 거치라 부릅니다. 거치가 발달할수록 잎의 활동성(수분조절)이 높습니다. 하지만 거치가 발달하려면 잎의 표면적을 넓혀야 하기에 잎의 온도 상실을 초래합니다.
난대성 수종(상록 활엽수)의 잎은 거치가 아주 미약합니다. 손가락장갑과 손모아장갑으로 비유하자면, 난대성 수종은 따뜻한 손모아장갑을 낀 것과 같습니다. 이는 추운 겨울에도 활동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반면 온대성 수종(낙엽 활엽수)은 대부분 거치가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활동성 높은 손가락장갑을 낀 셈입니다. 온대성 수종은 늦여름까지 열심히 일하고 가을에 물들어 낙엽을 떨구는 것으로 겨울을 납니다.
난대성 수종만 보던 제주 백성의 눈에 가시낭의 거치, 손가락장갑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온통 손가락장갑만 보던 온대성 식물학자의 눈에는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지만 제주 사람에게는 유별나게 보였을 겁니다. 제주 백성이 난대성 수종만 봤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에 부연해 보겠습니다.
마을 주변 곶자왈엔 사오기(산벚나무), 굴무기(느티나무) 등 온대성 수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을 인근에서 군락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제주의 온대성 수종 군락지는 해발 600~1400m의 고지대에서 형성됩니다.
반면 제주 곶자왈의 분포는 대략 해안에서 해발 500m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대부분 해안에서 해발 200m 언저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마을 주변의 곶자왈은 어김없이 난대성 수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제주 백성들에게는 멀리 있는 손가락장갑보다 마을 가까이 있는 손모아장갑이 친숙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친숙하지만 잎에 가시가 돋아 유별난 이 나무를 뭐라고 불렀을까요? 아마도 저라면 가시낭이라 불렀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해녀 노젓는 소리’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요 네 상착 떨어진들 가시낭이 엇일 말가”
5. 저는 가시나무 이름의 연원을 주장하려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가시(ガシ)가 제주의 가시낭의 원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더 설득력 있는 논거로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무리한 상상을 밀어붙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온대성의 시각으로는 난대성의 디테일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 식물학자의 문제이기에 앞서 바로 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몸은 난대에서 태어났으되, 배운 것은 까치의 설날이요, 남산의 소나무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였고, 욕망한 것은 민족이요, 국가요, 서울이요, 그리고 온대였습니다.
그 욕망이 결국 말에 가린 소를, 곰에 가린 거미를 보지 못하게 했고, 나뭇가지에서 가시를 찾느라 잎에 난 가시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 봅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