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훈 제주도지사는 2035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탄소중립 계획은 산업, 교통,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고민하고 실천해야 간신히 달성할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하지만 날로 심화되는 기후위기 문제에 비해 경각심은 여전히 낮다. 그 만큼 기후위기 문제에 대한 행정과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대응은 위해서는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인식부터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가령, 제주지역 대표 축제장에서는 화학물질을 이용해 오름 전면을 불에 태워버리는 행사를 하면서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행동에 동참해달라고 시민에게 요구하기는 민망한 일이다.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제주시는 이른바 '불 없는' 들불축제를 시민과 함께 기획해나가고 있다. 2025년 들불축제는 오름 불놓기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열 예정이다. 제주시는 들불축제 공론화를 거치고 시민기획참여단 등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모으며 이와 같은 들불축제 기본계획을 구상했다. 앞서 들불축제 숙의형 원탁회의 운영위원회는 축제의 미래에 대해 “‘생태·환경·도민 참여’의 가치를 중심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할 것을 권고한다”면서 “기후위기 시대 탄소배출, 산불, 생명체 훼손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대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고안을 받아들인 제주시는 생태적 가치와 동떨어진 '오름 불놓기'를 제외한 들불축제를 만들어나가기로 결정하고, 들불축제 시민기획단을 구성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축제 기획 참여를 도모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국적으로 콘텐츠 공모 사업 및 전문가 의견 수련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제주시는 지난달 ‘2025년 제주들불축제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관심사는 역시 오름 불놓기를 대체할 콘텐츠다. 제주시는 불을 놓는 대신 레이저, 조명 등을 이용해 새별오름을 빛으로 물들이고, 드론·미디어 파사드·미디어월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오름 불놓기의 빈 자리를 채운다고 밝혔다. '빛의 축제'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불맛'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소규모 달집태우기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축제장 일부를 캠핑 구역 등으로 설정하고, 푸드트럭과 라이브커머스 운영을 위한 공간도 제공하고 공연, 놀이 프로그램을 재구성한다. 시민 참여 공간 더불어 지속 가능한 친환경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일회용품 없는 공간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오름 불놓기의 스펙타클이 사라진 자리를 드론과 미디어 파사드, 레이저 쇼 등의 작업들로 대신하게 되는데, 드론쇼의 경우 이미 여러 지역에서 활용하고 있는 관광 아이템이다. 영상을 시설물 등에 직접 투사하는 미디어 파사드도 그 자체만으로는 새로운 아이템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킬러 콘텐츠가 보이지 않고 백화점식 프로그램 나열이라는 지적도 받고 있다. 또 축제장 일부를 캠핑 구역을 설정하겠다고 했지만, 통상 들불축제가 열려온 3월은 바람이 차갑고 매서울 때라 캠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캠핑에 참여할지도 의문이 따른다.
들불축제 폐지 결정 후 처음부터 새로운 축제를 만들기도 했다면 축제 기획은 보다 더 수월했을 것이다. '들불축제'를 열겠다면서 '불 없는 축제'를 이어가려니 축제 기획이 쉬울 리가 없다. 기존 축제 명칭 폐지 후 기후위기 시대에 맞은 새로운 생태적 축제를 새로 만들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공론화 과정을 존중한 모습이지만 논쟁적인 요소들은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부분이 됐기 때문이다. 2025년 들불축제는 '빛의 축제'의 가능성 점검하는 자리이다. '빛의 축제'라는 개념을 꺼내들었으니, 이를 충분히 충족시켜나갈 수밖에 없다. 빛의 축제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성과를 보이면서 장기적으로 '들불축제'의 명칭을 변경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제주시장이 바뀐 만큼 들불축제와 관련해 다양한 방식의 압력이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오름 불놓기를 하지 않는 들불축제 구상에 반발하는 이들이 없지 않은데, 대표적으로 고태민 제주도의원(국민의힘, 애월읍 갑)을 들 수 있다. 고태민 의원은 "들불축제는 지역 관광과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큰 축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오름 불놓기로 축제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왔다. 오름 불놓기가 100년 이상 된 유구한 전통인 양 말하지만, 사실 새별오름 전면에 불을 놓는 '전통'은 2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인정하자. 오름 불놓기는 그 규모 때문에 꽤 인기를 끈 관광상품일 뿐이다. 그 관광상품이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재평가받고 있다. 물론, 긍정적이지 않다. 오름 불놓기 행사를 다시 잇게 된다면 제주 행정 뿐만 아니라 공론화 및 기획에 참여한 제주도민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정치권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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