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인 난 설을 지나야 한 해를 마무리했다고 생각이 된다. 설을 앞두고 있는 요즘은 2024년 한 해를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되돌이표는 장마가 끝나가던 그 시점에 찍혀 있다. 한 달 정도 이어지던 장마끝 밭에 앉아 있을 때 든 생각은 ‘오늘까지 비가 내렸으면 난 죽을 뻔했구나’였다.
한 달 내내 우중충한 날이 이어져 밭에 나가지도 못하고 할 일을 찾지 못해 이래저래 오가기만 하던 시간.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가롭고 여유로움은 어느새 무료함을 넘어 우울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십 평생 처음 느껴보는 우울감은 의외로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이 탓인지 기후 탓인지 모를 그 느낌은 연말이 다가올 때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단 불안감도 느껴질 정도로 깊이는 만만치 않았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긴긴 여름처럼 요즘 나의 뇌리를 붙잡고 있는 깊은 고민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해 나의 몸과 마음을 무력감의 구렁텅이로 빠뜨렸겠지? 나이 탓으로 쇠해지는 체력과 기후 탓으로 무얼 해도 되지 않던 농작물, 10년 농민생활로 새로울 게 없는 나날들, 이런 것들이 여성농민 나의 몸을 꼼짝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
기나긴 여름 동안 가을 작물을 파종해야 했다. 여름의 한가운데 8월부터 겨울을 나고 자랄 여러 가지 월동 작물을 파종해야 하는데, 올해는 11월까지 이어지는 폭염으로 파종이 여러 번 실패했다. 당근은 3번의 파종 끝에 겨우 성공했고, 월동무도 두 번을 파종했다. 추석 즈음에 판매해 보려고 상추모종을 심고 또 심어봤지만 수확하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일쑤였다. 나의 조그만 비닐하우스에는 여기저기 녹아내리고 있는 상추 모종만 가슴 아프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요즘은 당근과 월동무, 상추를 수확하고 있다. 늦게 파종했고 겨우 자리 잡아 폭풍성장해야 하는 시기인데 추위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성장이 충분히 된 후 제주도의 겨울바람과 적당히 낮은 기온은 월동무의 단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주고 향이 끝내주면서도 단맛이 최고인 구좌 당근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성장기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월동무와 당근은 채 자라기 전에 추위와 맞닥뜨렸다.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미처 닿지 못한 채로 당근과 월동무를 수확하고 있는 농가가 많다. 우리집 월동무와 당근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라다 만 채로 수확시기를 맞은 작은 당근과 작은 월동무. 수확량이 예년의 절반 아래로 떨어지고 농민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다행인 건 가격이 받쳐줘 생산비를 충당할 수는 있는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당근농사는 어려워지고 농산물 가격이 높게 형성된다.
식량위기는 농작물을 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든다. 생산물이 없는 게 아니라 시장 가격이 높게 형성돼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체감하게 된다. 지금의 당근값과 월동무값은 식량위기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시장에서 농산물을 조금이라도 구매해 본 소비자라면 느낄 것이다. 작년의 사과값 이상현상이 있었고, 얼마 전엔 딸기값이 금값이었으며 몇 년 전 ‘파테크’를 겪은 걸 아직 기억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폭염과 폭우, 폭설이 빈번해지는 현상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분명 식량위기의 시작이다. 당근과 월동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귤값도 노지귤부터 레드향, 황금향 등 만감류까지 높게 형성돼 있다. 시금치 한 단, 쪽파 한 뿌리도 어느 것 하나 저렴한 게 없다. 김값이 두 배 이상 올랐다고 하고 수산물은 농산물보다 더 심하다.
기후위기로 농작물이 힘들어하는 동안 농민의 몸도 한계치에 다다를 것이 분명하다. 생체리듬이 적응하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음을 이제야 알아차렸다고나 할까. 기후위기로 시작된 지난여름의 무력감이 나와 장바구니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날씨변화로 통제가능한 방식의 스마트팜을 대안이라고 내놓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는 모양이던데, 더 의존적이고 더 통제 불가능임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석유 한 방울 없이는 한 톨의 씨앗도 싹 틔울 수 없는 게 스마트팜 시스템인데 아직도 그럴싸한 그림으로 청년농을 꼬드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더 자연과 한 덩어리로 순환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이 마당에. 나의 우울감의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김연주
전업농이 된지 7년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