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밭. (사진=김연주 제공)
당근밭. (사진=김연주 제공)

좀처럼 끝을 알 수 없었던 여름은 찬바람 쌩쌩 부는 늦가을로 성큼 다가왔다. 당근의 알맞은 발아 온도는 15℃ 내외다. 최고의 온도라 해도 25℃ 정도여야 발아가 양호하다. 제주의 날씨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여름의 끝자락이거나 가을의 초입이다. 시기적으로는 빨라야 7월 말 경이고 8월 15일 경이면 무더위가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7월이야 아직 여름의 한가운데이지만 8월 중순이 넘어가면 더위가 한층 누그러지는 시기이다. 보통의 날씨라면 말이다. 

올해는 9월 말까지 30℃를 넘는 기온을 기록했다. 당근을 파종하고 발아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다시 파종하고 또 기다렸다. 비도 내리지 않았고 당근 싹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의 파종에도 당근싹을 내지 못한 밭은 세 번째 파종을 했다. 우리의 조그만 당근밭도 세 번의 파종 끝에 겨우 싹을 내밀어 자라고 있다. 당근 파종의 어려움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심해진다. 

당근 파종을 세 번 하는 동안 사람의 노동은 3배로 드는 것이 아니라 5배쯤으로 늘어난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설치했던 설비를 걷어내고 다시 밭을 간다. 설비를 다시 설치하고서 밤이면 밤마다 확인하고 물을 돌리면서 싹이 트는지 매순간 점검하며 노심초사한다.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기원하며 다시 스프링클러를 돌려본다. 

작렬하는 태양빛을 야속해하며 땅근 싹을 힘차게 내밀어 자라주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농민의 노동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3배의 씨앗이 필요하다. 비료 혹은 퇴비는 처음 넣은 것으로 충분하지만 씨앗은 다시 구매해야 한다. 해마다 씨앗을 사야 하는 농민에겐 또다른 부담이다. 토종씨앗이라면 채종해서 이듬해에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당근은 대부분 농협에서 공급해 주는 F1씨앗을 구매해 농사짓는다. 

수확된 수박들. (사진=김연주)
수확된 수박들. (사진=김연주)

F1씨앗은 채종한(F1을 채종하면 F2, 다시 채종하면 F3·F4···) 다음해에 파종할 경우 F1의 형질만 고르게 발현되지 않고 어버이의 형질로부터 기인하는 다양한 형질이 발현된다. 예를 들어 달콤하고 큰 F1수박이 있다고 치자. 달콤하고 커다란 F1수박의 부모 세대는 크지만 단맛이 거의 없는 수박과 아주 달지만 작은 수박이다. 단독으로는 상품성이 조금 부족한 부모세대의 수박을 교잡해 F1을 만들어 내는 순간, 달고 큰 수박이 탄생한 것이다. 

F1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은 흡사 농업 혁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고르고 상품성 높은 농산물이 공장의 공산품처럼 밭에서도 생산가능해진 것이다. 반면 농민의 권리인 씨앗의 권리는 글로벌 종자기업에게 넘어가 버렸고, 채종할 수 없는 농민들은 해마다 종자기업의 종자를 구입해야만 한다. 

토종씨드림에서 수집하고 보존 증식하고 있는 토종 흰당근을 수년째 재배하고 있다. 당근 주산지인 이곳 구좌읍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는 당근과 비교하면 겉모습부터 맛까지 많은 부분이 다르다. 차라리 당근이라기보다는 인삼이나 더덕에 가깝다. 우선 색이 흰색이고, 맛이나 향이 당근향이 강하게 난다기보다는 살짝 더덕향이 나는 듯하다. 기다랗게 곧게 뻗은 당근 모양도 아니라서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도라지나 인삼과 비슷하다. 

어렵사리 파종에 성공한 당근은 한 달 정도 자라면 다른 풀들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은 밭이라면 풀들에 치어 자라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검질매기(제초) 작업을 해준다. 발아가 어려운 작물이라 씨앗을 충분히 뿌려둔 터라 당근도 빽빽하게 싹 터 자라고 있다. 

검질매기 작업을 하면서 당근도 적당한 간격으로 솎아준다. 당근을 솎을 때면 이 당근을 뽑을까, 저 당근을 뽑을까 하고 매 순간 고민에 빠진다. 간격을 생각하면 이 당근을 뽑아야 하지만 크기를 생각하면 저 당근을 뽑아야 한다. 한 달 동안 자란 당근이 너무나 기특하고 뽑아버리기 아까워 둘 다 남겨둔다. 그러면 석 달 후 그 당근은 둘 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로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경험에서 기인하는 과감함이 나의 당근농사를 돕는다. 이제는 제법 간격도 맞추면서 크기도 맞추는 당근 솎기를 해낼 수 있다. 

당근밭. (사진=김연주 제공)
당근밭. (사진=김연주 제공)

올해는 세 번 만에 파종 성공한 당근밭이라 성장이 느리다. 늘 남편과 둘이서 사이좋게 당근 솎기를 했었는데 올해는 삼촌들의 손을 빌렸다. 하루종일 작업하는 내내 이야기꽃을 피우면서도 깔끔한 작업을 선보여 아직도 초짜인 우리 부부를 감탄케 했다. 

당신네들의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부터 옆집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더니 동네 사람들의 안부를 다 확인한다. 그러다가 곧 당근의 안부로 넘어간다. 어느 밭의 당근은 안녕한지 다른 어느 밭의 당근은 어렵더라는 이야기 등 당근의 안부와 새로 파종한 월동무의 안부도 서로 죄다 공유하고,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감자밭의 안부를 공유하면서는 목소리가 한껏 커진다. 올해 최고의 감자 수확량이 예상된다면서 감탄을 연발한다. 밭을 빌려 줬더니 재해보험금을 받아 버려서 경영체가 사라지고 공익 직불금을 받지 못하셨다는 말씀도 하신다. 

하루종일 단 일초의 쉼도 없이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는데 하루 작업을 마칠 때쯤 깨달음이 있었다. 하루종일 고된 농업 노동을 이겨내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노동요가 필요했던 것처럼 노동 담화는 하루 노동의 필요조건이다. 이제 찬바람에 쑥쑥 자라는 당근을 보면서 수확의 그날을 기다리면 된다. 

김연주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지 6년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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