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은 나의 직업군에서 제외됐던 시절이 있었다. ‘농민은 안한다’가 아니라 ‘농민은 피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배곯던 시절을 겪었고, 나의 부모님은 행복한 얼굴을 하신 적이 별로 없었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농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때문에 그랬다. 농민의 얼굴은 초췌하고 농민은 세상의 비주류이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산다의 모델이었기에,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기에 농민은 절대로 되지 말아야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믿음은 어느 한순간 쉽게 무너졌고, 지금 난 농민으로 살고 있다. 이런 믿음을 깨기 위해 농민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농민이 되었다.
첫 기억은 태평농법이었다. 농민의 삶이 고달프고 힘든 이유 중 하나가 고된 노동에 시달려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책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이야기’(이영문, 2001)는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해주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다고 해도 고된 노동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생겼다. 태평농법은 무경운 농법(논밭을 갈지 않는 농법)을 접하게 해 준 첫 자료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경운 농법을 시도해볼만 하다 여기게 됐다. 밤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폭풍검색을 이어갔다. 쿠바식 틀밭을 접하고는 내가 직접 농사를 지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미 나이가 있었고 이제 시작한다면 곧 나이가 들 것인데 틀밭을 만든다면 나이가 충분히 들어서도 텃밭 정도는 가능하리란 생각에서였다.
어려운 농업용어를 끼고 자격증 공부를 하던 중에 ‘GMO(유전자 변형 농수산물)’를 접하게 됐다. 그때 읽었던 ‘유전자조작 밥상을 치워라’(김은진, 2009)는 나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분유와 우유를 마시고 있었고, 과자와 음료와 고기와 콜라를 주식처럼 먹기 시작할 때였다. 감자칩보다는 감자가 훨씬 건강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문을 처음으로 갖게 됐다. 내 주변에 널려 있는 거의 모든 식료품(농산물, 가공품, 축산물 등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GMO농산물로 만들어졌거나 가공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고 충격이 컸다. 믿고 있었던 감자가 결코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가 먹을 건 내가 직접 농사지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자급용이라 할지라도 시작해보자 맘먹었다. 그리고 농민으로 발걸음을 떼면서 전여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원으로 활동도 시작했다. 혹여라도 생산물을 만들 수 있다면 전여농에서 운영하는 언니네텃밭에 판매해 보리라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두었다.
밤마다 폭풍검색은 계속됐다. 자연재배를 접하게 됐고 ‘짚 한오라기의 혁명’(후쿠오카 마사노부, 2011)을 읽고는 방향을 잡은 것 같았다. 번역을 한 최성현 님의 여러 가지 책들을 읽고 공감에 공감을 거듭하고 자연농법을 이해하게 됐다. ‘사과가 가르쳐준 것’(기무라 아키노리, 2010), ‘신비한 밭에 서서’(가와구치 요시카즈, 2000)를 읽을 때쯤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하여 텃밭이라도 당장 해 보고 싶어졌다. 이른바 이론 공부는 끝났다. 실험실이 필요하다. 당장 조그만 텃밭을 구해 농사를 지어보기로 하였다.
책에서 무경운을 접하고 이론적으로 이해하였다 하더라도 나의 텃밭에서 무경운을 구현하기에는 적어도 3년이 걸렸다. 무경운으로 농사짓는 데 성공하여 수확물을 내는데 3년이 걸렸다는 것이 아니라 밭을 무경운으로 농사지어보는 데 3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확실히 다른 영역의 문제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자연농법 구현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송광일 농민이 계셨다. 지금은 귀농인들이 꽤 있어서 전국적으로 자연농을 실현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자료를 검색해도 몇 되지 않아서 자연재배 농민들의 실제 사례를 접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기적의 채소’(송광일, 2012)나 ‘기적의 자연재배’(송광일, 2013)를 읽어 보니 이제껏 읽어서 알고 있었던 일본의 자연농법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송광일의 자연재배는 비닐하우스라는 통제된 환경에서 구현하는 재배법이었다. 농민 저마다의 농법이 있듯이 송광일은 송광일의 자연재배를 구현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나의 농법을 만들어 나가기로 하였다.
나의 복잡한 생각을 잘 정리하고 싶은데 무엇인지 확실하게 잡을 수 없는 때가 있다. ‘진짜 채소는 그렇게 푸르지 않다’(가와나 히데오, 2012)는 나의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농민으로 살아가야 할지 생각이 한발 더 나아가게 해 준 책이다. 농사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안내서가 필요하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방식의 자료든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만의 농법을 구현하려면 양분이 될 만한 자료는 당연히 필요하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시작해본 적은 없는 듯하다. 늘 무기력하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로 흐르듯 흘러왔었다. 그러나 나의 농민으로의 입문은 열정적이고 활기찼다. 아직도 그 마음 간직하면 자연재배 농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농법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경우는 이랬다를 공유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나만의 농법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입문시절 나의 농철학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자연농법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이순간 마사노부의 자연농번을 어느 정도 구현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만의 자연재배를 나만의 자연농법을 구현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그 자리에서 난 충분히 훌륭하다.
김연주
전업농이 된지 6년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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