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추워진 날씨에 화들짝 놀란다. 어제까지 따뜻해진 날씨에 하우스 안에선 담을 바가지로 쏟아내고 봄이 왔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오늘 다시 날씨는 한겨울을 방불케 했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기온도 갑자기 뚝 떨어졌다. 며칠째 계속되는 산불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으나 먼지가 날리지 않을 정도로만 내린다고도 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나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더워진 날씨에 난방기구들을 이제는 사용하지 않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겨울이다. 얇아진 옷 때문인지 한겨울 추위보다 더 매섭다 느껴진다. 재채기가 계속되고 몸의 한기는 쉬이 풀리지 않는다. 비가림하우스안에는 조금 일찍 작물을 심어볼까 하다가도 봄추위를 이기지 못할듯하여 망설여진다.
어제는 우리 여성농민회에도 봄 씨앗을 파종한다는 소식이 두 곳에서 들려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탓에 모종이 하우스 안에서 자라겠지만 약 한달 여 시간이 지나 모종이 노지 밭으로 나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처음 여성농민회 활동을 하던 10년 전 쯤만 해도 4월 15일에는 노지 밭에 모종을 심었다. 수박이며 고추며 호박 등을 심고 가꾸었다. 가끔 밤기온이 낮았지만 크게 한파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몇 년 전까지는 4월 10일경 모종트레이에 씨를 넣고 노지에서 육묘했다. 한 달 후 5월 10일경 노지 밭에 정식을 했다. 그러던 것이 3년 전부터 모종이 자라지 않고 부실한 모종을 겨우 밭에다 심었으나 잘 자라지 않았다. 지온이 오르지 않아 성장이 더디었다. 이제는 그 매뉴얼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작년은 4월10일 씨를 넣고 하우스에서 육묘를 했음에도 모종이 잘 자라지 못하여 애를 먹었다. 남들이 다들 씨를 넣는다 하니 나도 씨를 넣어볼까 하다가도 잘 자라지 못할 것 같아 주춤거리게 된다.
노지 농사를 고집하다가 지금은 조그만 비가림하우스 농사도 하게 되었지만 노지에 어떤 농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막막하고 한숨만 길어진다. 당근은 파종 시기가 늦어지면서 잘 자라지 못해 작은 당근을 출하 할 수밖에 없었고 월동무도 크게 자라지 못하였다. 여름에는 장마기간 내내 비가 내리면서 수박밭 하나를 갈아 엎었다. 수박은 자라지를 않았고 풀만 무성해진 밭을 보면서 우울감이 싹트기 시작했었다. 토종씨드림에서 받아온 책임증식 토종콩은 공들여 모종을 내고 밭에 정식하였으나 벌레의 맹공격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여 씨를 잃어버리는 참사를 겪었다.
봄 감자를 조금 심고 비닐 멀칭까지 하는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황은 부실했다. 갈수록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날씨 탓에 안정적으로 농사를 계획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지금 완두밭은 꽃이 만발하였으나 수확까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2년전 봄에도 그 화려했던 완두꽃을 보기만하고 수확은 못했던 경험이 있어서다. 길게 이어지는 비 날씨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심지어는 겨울에도 우리를 힘들게 한다. 또, 언제 가뭄이 이어질지 모른다. 노지 밭이라 해도 관수시설 없이 농사짓기는 어렵다. 올해는 우리 밭에도 관수시설을 할까 고민 중이다. 관수시설 없이 당근 싹을 틔우기가 어렵고 싹을 틔우고 나서도 관수시설 없이는 키우기가 어렵다. 어린 싹이 뜨거운 태양열에 녹아 버린다.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는 물 관리를 잘 해 주어야 한다.
작년처럼 참외를 심을 것이고 수박모종을 넣고 하우스 안에는 토마토랑 상추랑 심을 것이다. 해마다 고뇌에 빠지게 하는 콩 농사도 이어갈 것이다. 겨울이면 수확할 당근과 월동무도 시기 맞춰 파종하고 심을 것이다. 재작년 토마토를 처음 심을 땐 토마토가 나를 설레게도 하더니만 이제는 더 이상 토마토가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 토종 수박도 토종 참외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해진 기후 탓에 활기찬 계획을 할 수 없다. 하긴 하지만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나에게도 작물에게도.
봄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랬는데, 빼앗기지 않은 들에도 봄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농민들도 노동자들도 일상을 아스팔트에서 보낸 지 어언 100일이 지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농민 활동가가 구속 수감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봄이 오는 들판에서 단호박 모종을 심다가 바쁜일손을 뒤로 하고 재판을 받으러 간 것이 바로 법정구속으로 이어졌다.
아직 우리의 일상에는 봄이 오기는커녕 한겨울 맹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한파를 아는지 모르는지 꽃들은 저들끼리 피었다 지고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닙니다. 양지바른 곳에는 봄나물들이 벌써 무성하고 달래도 크게 자라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듯합니다. 성큼 다가온 어느 봄날 서로 얼굴 맞대고 안부를 묻고 크게 웃으며 그 봄을 만끽하고 싶다.
김연주
전업농이 된지 7년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