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지난 4월 28일 정오 스페인 전역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신호시스템을 시작으로 해서 항공, 철도 교통이 마비되었다. 통신 및 결제시스템의 불능화로 경제활동이 멈춰버렸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배를 깔고 생애 처음 디지털 디톡스를 즐기는 듯 했지만 어둠이 내리며 방화, 폭동 등 집단범죄의 공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기본적 사회시스템 복구에는 채 24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 하루 사이 수조 원의 산업생산 손실이 발생했고 무엇보다 스페인 정부의 공공인프라 관리 능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손상되었다. 원래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스페인 사람들이라 끈끈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이번 재난을 잘 극복하리라 기대하지만 이번 대규모 정전 사태로 잘못 설계된 에너지 전환과정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 대정전 사태의 원인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유도 대기 진동, 높은 재생에너지 의존도, 전력망 연결 문제, 사이버 보안 취약성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계통안정화 실패, 특히 관성의 부족을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우선, 관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관성은 발전기의 회전하는 질량에 저장된 운동 에너지를 의미한다. 전력망 운영자는 이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력수요·공급의 불규칙성 같은 주파수 변화요인에 대응하게 된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인버터 기반 재생에너지 발전은 전통적인 회전체 기반 화력발전이나 원자력발전이 제공하는 관성을 공급할 수 없어 관성의 보충없이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지나치게 높히면 주파수 변화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져 전력망 안정성이 손상된다.

관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발전량이 어떤 이유로든 감소하면 전력망은 더 많은 관성을 잃고 결국 붕괴한다. 스페인 정전 발생 시점 전력의 발전원은 태양광(59%), 풍력(12%), 원자력(11%), 가스(5%)의 구성으로 최소한의 관성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초기 스페인 남서부 지역 태양광발전소 탈락으로 인한 주파수 변동을 보충할 계통 관성의 부족으로 추가적인 발전소 탈락이 발생했고 프랑스가 자국 전력망을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과의 연계선을 차단함으로써 스페인 전력망이 붕괴했다는 것이 스페인 국영 전력망 운영사 레드 엘렉트리카의 시각이다. 이번 사태는 육지와 제한된 연결성을 가진 '에너지 섬' 제주도에도 시사점을 준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전체 발전설비 용량의 50%를 훌쩍 넘어선 제주 전력망의 관성 취약성에 대비해야 한다.

현재 국가 전력망 운영주체인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는 전력망 붕괴에 대한 대비는 고사하고 전력 수급변화에도 대처하지 못해 빈번한 출력제어로 제주에서만 매년 수천억 원의 헛돈을 지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출력제어로 발전사업자가 전력을 생산하지 못할 때 지급되는 보상금으로 2023년 한해 출력제어로 인한 재생에너지 발전사에 지급된 용량정산금만 2300억원에 달한다. 이는 고스란히 전력요금에 반영되어 소비자에 부과된다.재생에너지 발전소 허가권은 지방정부가 가지는 반면 전력망 안정화를 위한 인프라는 한전이 담당하는 이중 구조 때문이다. 제주도정은 독점적 허가권을 가지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치중하는 반면 한전은 인프라 예산을 수익성 중심으로 편성하고 있어 인프라 예산이 재생에너지 확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사례에서 보듯 전력망 붕괴에서 오는 지역의 피해는 막대할 수 있다. 전력망이 불안정해진 지금 공공의 에너지 정책은 당연히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과 전력망 안정화 정책의 무게중심을 맞춰야 하건만 현재의 상황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기보다 책임회피를 위한 땜질식 처방이 주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력망 인프라 관리의 책임을 지는 한국전력의 경우 1)화력발전소 추가 건설, 2) 동기조상기 도입, 3) 배터리 저장시스템(BESS) 도입을 전력망의 안정성을 재고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중 화력발전소 추가 건설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명백히 역행한다. 오직 전력망에 관성을 제공하기 위해 수백억 원이 드는 동기조상기를 외국에서 사와 설치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전력망의 안정성에 기여하는 배터리 저장시스템(BESS) 도입은 경제성에 밀려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전력이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순응하면서도 경제성을 무작정 포기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탐라해상풍력발전소(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탐라해상풍력발전소(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현재 태양광과 풍력 등 관성을 제공할 수 없는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용량은 875MW에 이르는데 반해 배터리 저장시스템의 용량은 35MW에 불과하다. 여기에 최근 '매풍'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추자해상풍력발전사업에서 보듯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용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발전비율을 높이면서 전력망의 안정성을 재고하고자 제주도에서 들고 나온 에너지 정책이 이른바 ‘제주형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지정과 ‘수소경제육성’이다.

‘제주형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사업은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기를 우선 배터리 저장시스템에 보관하고 현지에서 직거래로 소비하겠다는 이른바 가상발전소(VPP) 플랫폼 사업이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제주도가 발표한 내용을 살펴보면 전기차 배터리를 저장시설로 사용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좀 먼 이야기라 차치하더라도 현재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의 4%에 불과한 BESS 용량을 전력망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분산에너지 사업이 가능한 30% 선으로 끌어올릴지에 대한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관계로 전력망 안정화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사업비의 60% 이상이 보조금으로 이루어지는 사업구조를 볼 때 시범사업 이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조차 회의적이다. 더욱이 가상발전소 플랫폼사업자의 면면을 볼 때 전력망의 안정성을 보장해야 하는 공공의 역할을 도정이 나서서 방기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든다. 제주도 가상발전소 플랫폼 사업은 계통 운영 권한은 한전이, 플랫폼 운영권은 LG가 가지는 이중적 구조로 이익이 상충할 경우 이를 해결할 보호장치가 미흡하고 사고발생 시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문제가 있다.

필자의 생각에 애초 플랫폼사업자인 LG에너지솔루션은 사업 리스크 분산을 위해 전략적으로 AVEL을 CIC로 분리하여 사업자로 내세운 듯 하다. 가상발전소 플랫폼 사업의 높은 시장 불확실성을 자회사로 격리하여 기술 실패 리스크 차단하고 ESS 화재 등 사고 발생 시 모회사 브랜드 이미지 훼손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겠으나, 이는 자본금 규모도 알려져 있지 않은 회사가 모회사의 자금력과 신용을 바탕으로 ‘제주도 분산에너지 특구’ 사업의 기술파트를 책임진다는 뜻이 된다.

제주도정이 가지고 나온 ‘수소경제육성’은 수소생태계를 만드는 방법으로 전력망의 안정성을 재고한다는 다소 엉뚱한 비전인데 수소는 에너지 사용의 계절적 변동성에 대응하는 저장수단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전력망에서의 응답속도를 고려할 때 망안정화 기능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질량 당 에너지가 높고 물 이외의 부산물을 만들지 않는 청정한 에너지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제외하면 산업으로 육성하기 어려운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가 나서서 수소 인프라를 깔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수소는 2차 에너지원이다. 수소는 자연상태에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서 기존 에너지원을 소모하며 만들어야 하고 따라서 경제성이 부족하다. 둘째로 수소는 부피가 매우 커서 운송을 위해서는 액화시키거나 압축을 시켜야 하는데 이 경우 어떤 에너지원과 비교하더라도 비용이 많이 든다. 셋째로 수소는 현재 정립된 연소법이 없어 연료전지 이외에는 안전한 사용법이 없는 상황이다. 넷째로 기술개발에 비용이 많이 들고 수요처가 한정되어 발전속도가 더디다.

이종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이학박사/사단법인 제주에너지정의네트워크 이사장)
이종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이학박사/사단법인 제주에너지정의네트워크 이사장)

제주도정이 지향하는 '탄소 없는 섬'이라는 비전은 분명 가치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현재 제주도의 에너지 정책은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에만 치중한 나머지, 전력망의 안정성과 효율적 운영이라는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특히 출력제어 문제가 심화되고 전력품질 저하 위험이 증가하는 현 상황에서, 전력망 안정성 강화로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은 시급한 과제이다.

‘수소경제육성’ 같은 재생에너지 확대보급을 위한 기저 인프라 사업은 당분간 미뤄두고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 확충 같은 전력망 안정화 방안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만이 재생에너지의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보장하며, 궁극적으로 탄소중립 목표를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경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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