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와 제주도라는 섬 사이에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물리적인 거리. 따지고 보면 육지 공항에서 제주도에 도착까지 한시간 안에 이뤄진다는 시간의 이점이 있다. 하지만 외지인들에게 제주도는 큰맘 먹고 가야만 품을 수 있는 이국의 먼 곳처럼 느껴진다.
처음 칼럼 연재를 시작하며 글솜씨 없는 내가 글을 쓰게 된 여러 이유들 중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육지와 제주도 사이에서 발생한 거리라는 편견 때문에 육지부 뮤지션들이 제주에서 공연하는 기회가 좀처럼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묘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 뮤지션들의 공연무대는 문예회관, 제주아트센터와 같은 관주도의 국한된 공간을 찾아야만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주의 도심과 외곽지에서도 뮤지션들의 공연무대를 접할 수 있는 무대와 공연장들의 생겨나고 있다.
'문화부심'이 충만한 용기 있는 사장님들의 투자로 인해 1년, 365일 제주의 도심과 외각지에서도 뮤지션들, 또는 예술인들의 공연무대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비정기적이고 간헐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공연장이 늘어난 만큼 제주 뮤지션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질 것이다. 더불어 육지부 뮤지션들에게도 제주를 찾아 공연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나는 순기능도 있다.
최근 그러한 순기능을 확인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지난번 평화로의 안개 숲을 헤치고 찾았던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라이브 펍 '플레이그라운드 1080'에서 펼쳐진 밴드 공연이었다. 육지부에서 유명한 블루스 기타리스트 '찰리정'의 공연.
찰리정은 2000년 미국의 세계적인 기타 전문학교 GIT에서 입학, 상위 레벨의 기타 커리큘럼을 이수하고 2002년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한 기타 수재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할 당시 LA 노스할리우드의 전설적인 핑거스타일 재즈 기타리스트 이자 칼럼리스트, 전문 세션, 기타 강사로 존경받는 테드 그린(Ted Greene)에게 2년 동안 레슨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육지부의 유명 뮤지션이 제주도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제주의 공연무대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미국 유학파 기타리스트가 플레이하는 전통 블루스 장르이지 않나.
공연이 펼쳐지는 플레이그라운드까지 편도로 45km의 거리를 달려갔지만 공연장까지 당도한 거리와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공연 전 만난 찰리정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그의 CD를 구매했다 A4용지와 CD에 친필 사인까지 받았다.
처음 만난 관객인 내 사인 부탁이 무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흔쾌히 사인에 응해주는 찰리정. 뮤지션과 같이 찍는 사진, 그리고 친필사인은 공연장을 찾는 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특권이다.
찰리정과의 몇 번의 담소가 이어졌는데 알고 보니 찰리정의 어머니께서는 2009년부터 서귀포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찰리정도 제주도와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인데 제주도민으로서 반가웠다.
짧은 몇분의 시간이 지난 후 약속된 공연이 펼쳐졌다. 이날 공연의 세션은 다음과 같다.
Guitar & Vocal : 찰리정
Piano : Paul Kirby
Bass : 박수현
Drum : 유성재
찰리정을 제외한 다른 악기 파트별 세션들의 면면이 흥미롭다. 키가 훤칠한 백인 피이니스트, 제주에서 활동하는 실력파 세션 드럼과 베이스. 이들은 찰리정의 제주공연을 위해 모이게 된 특별한 인연들이었다. 음악에 진심인 뮤지션과 세션들은 인종과 나라와 지역을 초월하나 보다.
다음은 이날 펼쳐진 공연 영상(link1, link2, link3, link4)이다.
이날 “찰리정”의 공연에서 허를 찔렸다. 오로지 블루스로만 연주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애시드 재즈, 팝, 사이키델릭에 심지어 앙코르 시간엔 록밴드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i’ll be missing you>를 연주하며 그야말로 무대와 관객을 들었다 놔버린 것이다.
처음 접하는 찰리정 공연에서 머리속에 상정해봤던 풍경과는 다른 그림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다. 찰리정의 공연에서 목격했다. 공연장에서 수줍은 제주의 관객을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호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무대 난입과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공연의 클라이 막스에 이르러선 관객들이 너도나도 무대 앞으로 다가가 춤을 추고 응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했다. 찰리정의 이날 공연에 대한 선택과 생각이 통했다면 찰리정은 명석한 지략가이며 무서운 전술가이다.
나중에 찰리정을 통해 확인한 사실인데, 원래 계획은 블루스로만 공연시간을 가득 채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공연 전 장르와 레파토리가 변경됐다. 공연 전 짧은 시간만이 허락되었을 터인데 그 짧은 시간내에서 세션과의 합의와 합주를 통해 이런 퀄리티의 공연무대가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감히 평범한 이가 침범치 못하는 프로들만의 영역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솔직히 소름돕도록 무섭기도 했다.
열정의 무대를 선보인 찰리정과 찰리정이라는 유명 뮤지션을 섭외해 주신 플레이그라운드 1080 주인분들에게 감사하다. 나중에 제주도 뮤지션들과 육지부 뮤지션들의 콜라보 공연도 자주 열렸으면 한다.
Rock음악을 하두 좋아해서
락하두라 스스로를 자칭하는
평범한 중년의 제주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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