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정은문고
‘결혼’이 고민인 이들을 위해 좀 고약한 책을 준비했다. 결혼을 할까 말까, 그런 거 말고. 그냥 결혼이라는 게 대체 뭔가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아름다운 사랑으로 둘러싸인 건강한 결혼 생활에 환상을 가진 분들을 '혼쭐'내려 드는 ‘못된’ 심산이기도 하다. 바로 에밀 졸라의 《결혼, 죽음》이라는 책으로. 그리고 이는 남편에 대한 일종의 복수이기도 하다. 그는 기회만 되면 이 [한뼘읽기] 코너에서 아내인 나를 망신 준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에밀 졸라를 가장 재미없게 소개하는 방법은, 19세기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재미는 없어도 좀 의미 있게 말하는 방법도 있다. “나는 고발한다!”면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고, 덕분에 죽는 날까지 군부와 가톨릭교회로부터의 압박을 면치 못했던 지식인이라는 것. 《결혼, 죽음》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농민 계급의 삶에서 결혼과 죽음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찐’ 리얼리즘 스토리들이다.
익히 아는대로, 귀족들은 “결혼이야말로 한 자리 해먹으려면 꼭 필요한 토대”라서 결혼에 공을 들였다. 자본 확충을 위한 비즈니스의 하나로 결혼 제도를 활용하는 게 그들 사이의 상식이었다. 부르주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는 그저 그런 상류층의 세시 풍속이라고 해두자.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에서는 그렇게 비즈니스로 이어진 두 귀족 남녀가 결국에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보여주지만, 에밀 졸라가 그려낸 귀족 부부는 열네 달 후부터는 각방을 쓴다. 부르주아 부부는 헤어지지는 않은 채 열심히 새로운 애인들을 찾는다.
귀족들의 이야기들은 그렇다 치고, 재미있는 대목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상인의 결혼 생활. “가정이란 일종의 잘 맞추어진 시계 같아서 부부 역할을 잘하면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점을 잘 알았다. 이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분명한 점은 돈을 토대로 잘 짜인 솔직한 동업자라는 것이다. 둘은 늘 동침했다. 따로 자면 침대보가 이중으로 더럽혀져 세탁하는 데 돈이 더 드니까.” 에밀 졸라 시대 상인의 사랑은 오늘날로 치면, 중년 부부의 결혼 생활쯤에 비견할 만할까. 에밀 졸라의 문장을 이렇게 한 번 다시 써보자. 오래된 부부가 여전히 뜨겁게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분명한 점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동업자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당신들이 기다렸을지 모를 뜨거운 사랑은, 귀족과 부르주아 상인을 거쳐 서민 그러니까 가난한 이들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클레망스는 이제 서른 살이다. 그동안 아이 세 명을 기르느라 금발 머리는 누렇게 변했고 얼굴도 많이 상했다. 발랑탕은 술에 절어 생활했다. 입 냄새는 고약했고 대패질로 팔뚝은 굵었지만 몸은 전보다 야위었다. 봉급날이면 목수는 술에 잔뜩 취했고 호주머니는 비었다. 그렇게 귀가하는 날엔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아이들은 울어댔다. 차츰차츰 아내는 남편을 잡으러 술집에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다 자신도 담배 연기가 자욱한 술집 탁자에 걸터앉아 술을 홀짝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은 아내의 뺨을 때렸고 아내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니. 이 소란하고도 구차한 생활 속에서 어떨 땐 데울 불도 먹을 빵도 없지만, 낡고 뜯어진 커튼 아래 놓인 침대에서는 밤이면 사랑의 애무가 날갯짓이라도 하듯 파닥거렸다.”
안다. 누구도 이런 사랑의 풍경을 꿈꾸며 결혼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낯선 풍경도 아니다. 사랑만 그런 건 아니고, 애도 역시 비슷하다. 귀족 부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돈을 지키는 데에 골몰하고 자식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장례비용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이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집의 죽음은, 아이가 죽은 다음에야 구호품이 도착하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이상적인 사랑과 진짜 애도는 어딘가에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에밀 졸라의 시대에나 지금 이곳에서나.
나는 남편이라는 종족과 24시간 붙어 지낸다. 금실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런 정도의 경제적 조건밖에 허락되지 않아서 그렇다. 자영업자인 나는 인건비 줄이는 걸 최대의 경영 전략으로 삼고 있다. 내가 커피를 만들면 그가 서빙을 해야 한다. 내가 파스타를 만들면 그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이전에 노동의 공동체다. 이런 경우, 헤어지기가 살기보다 더 어렵다. 에밀 졸라가 살아 있다면, 우리에 대해 이렇게 쓰리라. "사랑과 동업 사이에 낀 내 남편은 어떻게 되었나."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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