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중순께만 하더라도 이른 아침이면 풀잎마다 이슬이 맺혔었다. 그때는 6월치곤 안개가 자주 내렸고 습도가 높았다. 그러다 여름이 덜컥 찾아왔다. 평년보다 기세가 상당해서 때 이른 불볕더위와 열대야로 밤낮이 뜨겁다. 심지어 장마 기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비는 간헐적인데다 강수 편차가 심하다. 해마다 때마다 기후위기를 말하는데 지금처럼 그 말의 위력을 실감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생활을, 주변을 돌아봐야 할 때라는 경고음이 마음속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기후위기는 100년 전부터 대두된 세계의 화제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법 실마리를 찾는데 좋은 길잡이가 돼주는 것이 있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이다.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고 파생되는 모든 것에 대한 고민과 사유 또, 연구 결과물들이 담긴 책들.
세상을 깨우는 책 바람을 일으킨다
1993년 4월 1일, 서울 명륜동에 인문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이 문을 열었다. 26년 2개월 11일 동안 한 책방지기가 그곳을 지켰다. 그의 이름은 은종복.
사전에서 풀무질은 대장간에서 쇠나 낫을 만들 때 불을 피우기 위해 바람을 넣는 기구로 정의되는데 ‘책 바람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회지에서 따 왔다.
이 학회지의 이름은 ‘풀무질’이다. 학회지가 만들어진 시기인 1970~80년대에 '잘못된 군사정권에 불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를 차용한 것.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서점은 우리나라에서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많기로 손꼽힌다.
서울 명륜동의 풀무질은 ‘제주 풀무질’의 모체다. 제주 풀무질은 지난 2019년 7월 25일 제주시 동부의 시골마을 세화리에 터를 잡았다. 이곳의 책방지기의 이름은 은종복. 그렇다, 서울 풀무질을 열었던 이가 제주에 둥지를 틀고 ‘제주 풀무질’을 연 것이다.
강산이 두 번이 바뀌고 또 한 번 바뀌려 할 즈음 서울 풀무질은 심각한 경영난을 직면했다. 월세 내기 빠듯한 게 꽤 됐는데 책은 순환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출판사에 지불해야 할 대금을 제때 주지 못하는 날이 길어졌다. 미수금의 금액 역시 기간에 맞춰 늘어만 갔다. 결국 1억 5000만원이라는 빚을 졌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가족들은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제주로 가기를 원했다. 부모님이 도와주셔서 산 낡은 아파트를 팔고 빚은 갚고 제주에 내려온 것이 2019년 6월이었다.
그의 나이 28살부터 책방을 운영했으니 올해로 꼭 29년 차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표방하고 있는데 관광지 제주에서 그것도 대학가나 중심가가 아닌 시골 마을에서 계속 ‘인문사회과학 전문책방’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이 밥을 먹으려면 밥과 반찬이 있잖아요. 저는 인문사회과학 책은 밥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밥보다 반찬을 더 많이 먹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밥이 아예 없는 밥상은 드물어요. 그럼 왜 인문사회과학 책이 밥일까요. 인문사회과학 책은 우리가 이 땅에서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음을 던져요. 이 세상은 누구 하나 동떨어져서 살지 않아요. 그물코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슬픔과 기쁨을 주면서 얽혀 있어요.
인문사회과학 책은 이런 삶에 중심을 잡아 주어요. 특히 요즘은 누구나 손전화기를 갖고 있어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어요. 그럴수록 잘못된 정보에 빠지기 쉬워요.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하듯이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올곧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찾았으면 좋겠어요.”
비록 서울 풀무질에서 떠나 왔으나 어쨌든 그는 그곳에서 26년을 버텼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증명한 것이다. 숱한 고비들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곳은 운영 중이다. 그가 내려오기 전 세 명의 젊은이에게 그곳을 물려주었다. 세 명의 공동 대표들은 여전히 인문사회과학 책을 판매하고 그곳에서 여러 모임을 하면서 밥심의 중요성을 은종복씨처럼 알리고 있다.
은종복씨는 서울 풀무질에서 책 읽기 모임을 10개쯤 했었다. 제주 풀무질에서도 책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녹색평론을 함께 읽는 모임도 있고 고전 읽기 모임도 있다. 서울 풀무질과 제주 풀무질 독서 모임의 차이점은 제주 풀무질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소속감이 높고 참여자 변동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방안을 같이 실천할 수 있다. 어쩌면 쫓기듯 제주에 왔을지언정 제주에서 그는 그가 꿈꾸었던 실천적 세계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26년, 제주에서도!
제주 풀무질은 세화리 내에서 한 번 자리를 옮겼다. 처음 문을 열었던 곳은 주인이 헐값에 임대를 해주었다가 갑자기 월세를 껑충 올리는 바람에 지난해 7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곳은 제주로 내려왔을 때 가진 빌라 전셋돈으로 땅을 산 곳에 은행 대출로 집은 지은 곳이다. 책방지기는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15년 동안은 꼼짝없이 은행에 메여 있게 됐으므로 책방을 계속 운영할 수 밖에 없다며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표정이 무척 해맑다. 그가 책방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제주 돌집을 개조한 책방엔 환경, 인권, 동물권, 문학 서적들이 가득하다. 한쪽엔 그림책 코너가 있는데 주워왔다는 작은 의자가 창문을 마주해 놓여 있다. 창가엔 색연필과 노트가 있다. 여긴 꼬마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림책을 보고 따라 그리거나 아이들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한다. 책과 책방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성장해 가면서 책방을 많이 찾도록 하기 위한 책방지기의 속 깊은 생각이 담겼다.
제주를 소재로 한 책들을 위한 코너와 독립출판물도 있어서 인문사회과학 책이 아니더라도 선택의 폭이 넓다. 아무래도 주요 고객이 관광객이다 보니 그들의 선호에 맞춘 책 역시 두루 갖춘 것이다. 그리고, 한켠에는 하얀 강아지의 그림과 사진 등이 진열돼 있다. 이곳의 인기스타이자 영업부장인 반려견 ‘광복이’ 코너다.
순백의 풍성하고 보드라운 털에 까만 눈과 까만 코를 가진 기품있는 광복이는 떠돌이 개였다. 광복절에 종복씨의 집에 들어와서 이름이 ‘광복이’라고. 광복이는 목에 철사 두 겹이 감겨 있었고 온몸이 진드기 투성인데다 무척 말라 있었다. 심장사상충까지 걸린 상태였다. 돈이 아쉬운 때였지만 광복이를 치료하고 가족으로 맞았다.
그의 가족이 “종복이는 버려도 광복이는 안 버린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광복이는 종복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 늦둥이다. 매일 하루 몇 차례 광복이와 종복씨 부부는 세화리 마을 곳곳을 산책한다. 광복이 덕에 건강도 챙기고 웃을 일이 더 늘어서 이만한 복덩이가 없단다.
광복이를 가족으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종복씨는 제주에 유기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제주에 내려오던 해 비자림로의 삼나무 수천 그루가 잘려 나가는 것을 봤다. 제주 제2공항 건설로 도민들이 갈등하고 있다는 것도 깊이 체감했다.
이 아름다운 섬이 그 모습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깨끗함을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그는 고민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피켓을 들고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는가 하면, 글을 써서 이곳저곳에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자리를 함께 한다. 책방 운영도 빠듯한데 자신이 살고 있고 자신이 아끼는 제주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이곳의 벽면엔 무언가 많이 붙어 있다. 명함들이다. ‘풀무질’의 상징성은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과 은종복이다.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명함을 남긴다. 그 명함을 소중히 간직하는 그의 방법이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는 것인데 그 많은 명함들은 이곳이 그리고 그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증명한다. 아무리 오래된 서점이라고 해도 이토록 상징성을 갖기란 쉽지 않다.
책에 대한 사회에 대한 30년 가까운 헌신과 집념. 타인과 좋은 책을 나눔으로써 발생하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다이아몬드는 그 어떤 압력과 뜨거움에도 변하지 않기에 아름답다지 않는가. 책방 ‘풀무질’도, 그도 화려하게 눈을 압도하는 반짝임은 아니지만 은은하게 그러나 확실한 존재감으로 세상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틀림없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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