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손님이 책방을 찾았다. 혼자서 책 구경을 하는 딸과 달리 어머니는 공간에도 책에도 크게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어떤 책을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의 제목이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고 했다. 책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있는 너에게/ 최대호 산문집>. 조금 냉소적이었던 어머니 손님은 책방을 나설 때 다른 이가 돼 있었다. 촉촉한 눈가에는 어떤 희망의 빛이 보였고, 떠나는 발걸음은 보다 더 경쾌해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 머리칼이 희끗한 할머니 한 분이 책방을 찾았다.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사시는 분으로 근처 병원에 오셨다가 ‘책’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오신 것이다. 할머니는 ‘여기 앉아도 되나요?’, ‘이 책을 봐도 되나요?’ 등등 하나하나 양해를 구할 만큼 신중하고 조용한 분이셨다. 책도 한 장, 한 장 소중히 다루셨다. 책방지기는 할머니께 찾는 책이 있는지 여쭤봤다. 할머니는 여행책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사진이 많은 여행책을 추천해 드릴지, 아니면 여행지가 많이 소개된 책을 추천해 드릴지 재차 여쭸더니 여행책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할머니는 그러다 책방지기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발견하셨다. 책방지기는 ‘여기를 다 직접 다녀왔나요?’라는 그의 물음에 그렇다고 했다. ‘너무 부럽네요.’라고 대답한 할머니는 일평생 섬을 떠나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유럽 여행이 꿈이라고 하셨다. 사실 지금 여행을 가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꿈을 갖기에 늦은 나이는 없고 꿈이 있는 한 삶은 무한히 아름답다. 소녀처럼 책들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여행’이란 글자만 적힌 가장 두꺼운 책을 사고 가셨다.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는데 여행을 다녀오신 후에 재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나도 행복할 것 같다.
혜경씨는 ‘일단, 저질러보자’는 생각에 책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을 통해서 값진 경험을 하고 있어서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다고 했다. 어떤 날은 손님이 없기도 하고, 손님이 있다고 해도 책 한 권 팔지 못하는 날도 있지만 그럼 어떤가.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이 너무나 귀한 것을. 혜경씨는 자신이 책방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곳을 책방으로 만드는 건 자신이 아니라 손님들이라고 했다. 언젠간 이 인연들을 글로 엮어 책을 낼 계획이다. 그는 차츰 독자적인 출판사를 운영할 계획이다. 자신의 경험이 담긴 수필도 펴내고, 지인들과 힘을 모아서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도 펴내고 싶은 꿈이 있다. 꿈이 있는 한 삶은 무한히 아름답다. 지금, 혜경씨는 어떤 아름다움을 보고 있을까? 그의 길을 응원한다.
책방 운영이란 꿈은 그가 여행을 다니면서 갖게 됐다. 재밌게도 그는 대학생 이전에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만화책이라도 읽으라고 했을 정도. 그가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뿐인 오빠의 공이다.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혜경씨는 본인이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하고 보니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무척 컸다. 잘해준다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휘둘리게 되는 일이 잦았다. 마음의 상처가 점점 커졌고 남몰래 우는 일이 많았다. 그런 혜경씨의 성격을 잘 알던 오빠가 하루는 책 한 권을 선물했는데 맨 앞장에 쪽지가 있었다.
‘스스로가 단단해져야 누군가를 만나도 자신의 삶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 책은 내면을 단단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마지막 말이 혜경씨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다. ‘너를 열렬히 응원하는 오빠가.’ 이 문장에 눈길이 멈춘 혜경씨는 꽤 많이 울었다. 이 짧은 문장 하나를 보면서 혜경씨는 처음으로 글이 주는 힘을 깨달았다. 앞서 한 손님이 책의 제목에 이끌려 마음을 위로받았듯, ‘여행’이란 단어 하나만으로 미래를 희망하듯. 진심이 담긴 글은 천하무적이다. 온몸에 행복한 전율과 감동을 줘서 자꾸만 다른 글들을 찾게 한다. 그래서 계속 가까이하게 한다.
그렇게 혜경씨는 다독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혜경씨는 한참 여행을 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 책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고. 누군가의 경험이 묻어낸 책을 선호하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떠나 왔지만 여전히 마음이 공허한 사람들이 들러서 쉼을 청하고 책 속의 글들을 통해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
기분이 좋을 때, 운명이 내 편이라고 느껴질 때 말고 조금은 울적할 때, 기대고 싶을 때, 혼자만의 동굴이나 대나무 숲이 필요할 때 '작은숲책방'에 갈 것을 추천한다.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어야 할 때, 그러나 멀리 떠날 수는 없을 때 이곳에서 여행책을 읽으면서 낯설음을 체험하기를. 낯설음은 설렘, 새로움, 시작의 다른 말이므로.
이 낯선 책방에서 책 몇 권을 안고 돌아왔다. 책들의 몇몇 문장들은 내 눈길을 끌었다.
“잠 오지 않는 새벽엔 산책을 한다. 밤새 여러 번 나갔다가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라 산책인가. 밤공기 속에 누가 이토록 숨 쉬는 문장을 숨겼나." - 안리타 <모든 계절이 유서였다> 중 ‘산책’ 전문
“사람은 살면서 이백 가지 소원을 빌어요. 근데 있죠, 이루어지는 건 삼백 가지래요. 누군가 나를 위해 빌어주는 소원도 있어서요. 거참 행복하지 않은가요.” - 윤두열 <그때 나는 혼자였고 누군가의 인사가 그리웠으니까> 중 ‘소원’ 전문
“본디, 어딘가를 향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각자의 외로움과 동행하기 마련이지요. 사람은 어찌하여 어딘가를 향하는 것일까요. 그 정처 없는 서운함과 부지런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고독의 끝에 당도하게 될까요. 창가에 허옇게 얼어붙은 서릿발마저 때로는 온기가 그립지 않을까 싶어 조용히 손을 마주해 보았습니다.
가느다란 떨림과 투명한 기척이 피부로 전해져오는 것이 느껴지네요. 사실은 세상 만물이 이처럼 조용히 울먹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독한 것은 고고한 것입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슬픔의 무게만큼 오늘 하루, 당신의 발걸음이 부디, 하염없는 그 울먹임처럼 곱게 반짝였으면 좋겠습니다.” - 김민준 <상실의 끝 고독의 완결> 중 ‘하루’의 일부분
멈추었기에 나는 자각하지 못했던 감각을, 그 살아 있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책들의 문장 속에서 날섰던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고 미움과 이기심이 아닌 이해와 존중이 다시금 가슴에 차올랐다. 이 책방이 있어 내 삶의 주파수를 재조정할 수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날, 여러분의 주파수를 재조정할 문장들을 가슴에 새겨보기를.
#. 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 김민준 글
‘두고 두고 꺼내 읽고픈 아련한 책 한 권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수필가이자 시인인 김민준이 2017년에 펴낸 책으로, 그의 전작인 <시간의 모서리>, <계절에서 기다릴게>와 함께 두루 사랑받는 책이다.
김민준 작가는 김혜경 책방지기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문장들을 통해 많이 울고, 웃어서 여행에 나설 때 늘 그의 책을 챙기고 다닌다고. 이 책은 가장 찬란한 시간인 ‘지금’을 불안과 외로움에 주저하지 말고 ‘함부로 아름답게’ 나아가기를 응원해 책방지기가 손님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책 중 하나다.
#. 시의 문장들 /김이경 글
시가 어려웠던 김혜경 책방지기에게 시의 세계를 알려준 책이다. 시의 전문이 아닌 한 구절을 인용해 시를 해석하기도 하고 글쓴이가 느꼈던 감정을 적어 놓고 있다. 책방지기처럼 시가 어렵게 느껴지거나 조금은 가볍게 시를 만나고 싶은 이들이 읽기 좋다.
※ 작은 숲 책방은 제주시 서사로21길 4 1층에 있어요.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작은 책방으로 공간을 대여해주기도 해요.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은 쉬고요.
낮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합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책방의_탄생] 떠나면 알게 된다, 돌아갈 곳이 있음을
- [책방의_탄생] 세상을 위한 밥
- [책방의_탄생] 우리의 언어, 우리의 공간
- [책방의_탄생]별일이 없지만, 있습니다
- [책방의_탄생]누군가의 마음에 마중을 나가고 싶은 마음
- [책방의_탄생]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 [책방의_탄생]세상의 모든 ‘ㅅ(시옷)’
- [책방의_탄생] 당신을 위한 인터뷰
- [책방의_탄생] 제주를 위한 인터뷰
- [책방의_탄생]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 [책방의_탄생] ‘가능성’으로 가득 채워진 방
- [책방의_탄생]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 [책방의_탄생] 오래됐지만 살아 있어 아름다운 책들의 방
- [책방의_탄생] 귤밭을 지키고 싶었어요
- [책방의_탄생] 나누고 소통하고 인연을 만드는
- [책방의_탄생] 아버지의 월급 선물
- [책방의_탄생] 창조적 부적응자
- [책방의_탄생]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 [책방의_탄생] 꽃에 불면 꽃바람이 된다
- [책방의_탄생] 100개의 책방을 꿈꾸며
- [책방의_탄생] 나다운 삶을 사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