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기 강선미씨의 이전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창구 업무가 아닌 고객들의 불편 상담을 맡았었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은행엔 생각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았다. 무수한 타인들 중에는 친절한 이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도 꽤 됐다. 낮은 자세로 대할수록 그를 낮춰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일과 삶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사회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미씨는 당시 삶의 대부분을 남에게 맞추며 살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에는 공허함이 커졌다. 타인을 배려하느라 마음속에 자신의 영역과 입지가 점점 좁아진 것이다.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위해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어느새 선미씨는 없었고 타인들의 고민과 불만과 불편함이 그를 내리눌렀다.
살고자, 숨을 쉬고자 주말이면 산을 찾기 시작했다. 산에서는 불만과 불편함을 들을 일이 없었다. 눈치 보지 않고 내면의 짐을 실컷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맑은 공기는 그의 온몸 구석구석의 세포들을 깨웠고, 시원한 바람은 복잡한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줬다. 앞길이 막막해도 내딛는 한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산 정상에 다다르면 매번 새로이 깨닫곤 했다.
그의 지친 일상을 구원해 준 산을 통해 남편을 만났고, ‘나눔’이라는 커다란 축복을 얻었다. 산을 알게 된 후 그는 크리스마스를 한라산이나 지리산, 설악산에서 보냈는데 한 해는 산악 동호회원들과 한라산에서 성탄절을 맞기로 했다. 동호회원 중에는 제주에 산을 타는 지인이 있어서 자연스레 술자리를 하게 됐는데 제주 일행 중 한 사람이 남편이었다.
최명희 선생의 소설 <혼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이 둘의 인연의 고리는 ‘삐끗한 다리’였다. 다리를 삐끗한 선미씨를 지금의 남편이 숙소까지 데려다줬고, 이후 선미씨가 고맙다는 연락을 한 것이 만남으로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선미씨 가족이 제주 여행을 왔을 때 지금의 남편이 가이드를 하게 됐고, 어쩌다 보니 선미씨가 제주에 왔을 때 남편의 가족과 식사를 하게 되면서 서로의 가족에게 인사 아닌 인사를 하게 됐다.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는 인연을 이렇게 제주에서 만났다. 한라산이라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고, 오름이라는 작은 산들이 360여 개나 있는 산의 땅, 제주에서 말이다.
산을 타면서 선미씨는 자폐 아동과 짝을 이뤄 산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산을 타본 경험이 없는 이와의 산행은 번거롭고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아이와의 산행은 왜인지 편안했고 즐거웠다. 산을 오르며 노래도 부르고, 지친 기색이 보이면 같이 땅에 엉덩이를 붙여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그 아이와 함께 바라보는 하늘과 숲은 이전에 선미씨가 알던 그것과는 달랐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는 것, 누군가를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게 이끌었다는 것. 이것이 선미씨의 삶을 바꿔 놓았다. 나눈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님을, 자신은 나눔으로써 더욱 행복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산의 땅 제주에서는 정작 산에 오르는 일이 줄었다. 육아와 살림에 발이 묶였다. 아니, 그런 줄 알았지만 이미 제주라는 자연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굳이 산을 찾지 않아도 견딜만한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책방 겸 사랑방을 운영하면서 마음이 비워지면 비워졌지, 짐이 쌓일 일이 없다고.
책방 귤다방은 옷, 소품 등이 판매되는 작은 상점이기도 하다. 홍보가 필요하고, 가게가 필요한 이들에게 선미씨가 공간을 무료로 내어주면서 귤다방 안에 들어서게 됐다. 자신에겐 공간이 있고, 공간이 필요한 이가 있어서 나눴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나누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그의 말이 참 따뜻하다.
올해부턴 매달 셋째주 일요일에 ‘귤다방 프리마켓’이라는 벼룩시장을 열고 있다. 영세한 소상공인들을 위해 마련한 장이다. 너른 귤밭에서 소상공인들은 자신들이 손수 만든 것, 특별히 제작한 것들을 정성스레 진열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판매를 한다. 이 역시 어떤 수수료도 없다. 특색있는 셀러들이 장에 나오니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마을인 대흘리와 이웃마을 주민들에게도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다.
모임도 꾸준히 열고 있다. 전업주부 가운데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다소 여유가 생기는 이들이 있다. 그 여유를 얻기 위해 전업주부들은 고군분투한다. 살림, 육아를 하며 여유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아. 그런데 막상 그렇게 여유를 만들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결혼 전에는 사회인 중 한 명, 즉 ‘자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 며느리로 살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바라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본인도 한때 그런 막막함이 있었기에 선미씨는 그들을 위해 독서 모임, 그림 그리기 모임, 배우기 모임 등을 열어 함께 하고 있다. 선미씨와 모임 동기들이 만든 작품들은 마을의 특정 장소에서 전시가 되기도 하고, 연주회를 열기도 하면서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렇게 보면 책방 귤다방은 시부모님의 귤밭을 지키기 위해 시작됐고 지금은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책방 귤다방을 찾은 날은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하늘은 높고도 맑았고 짙푸른 초록잎사귀 사이로 주렁주렁 달린 노오란 귤은 눈 앞에 있으면서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리고 청명한 하늘만큼이나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 이곳의 공기엔 여유가 있다. 재촉하는 것이 없이 뭔가 느긋하다. 나누는 것이 일상인 곳엔 사랑만이 있어서 근심은 들어설 틈이 없는 것일까?
이곳은 그 언제 목이 말라 물 한 모금 달라고 들어가 털썩 주저앉으면 기다렸다며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다. 갈증을 달래 후 둘러본 책방에서 마음을 이끄는 책을 만나 또 다른 경험에 빠지게 될 테지.
사람이든, 책이든, 추억이든 뭔가 인연을 쌓게 하는 마법의 통로, 책방 귤다방이다.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오랜 편집자 생활을 뒤로 하고 늦깎이 작가로 데뷔한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로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며 뒤따르는 주인공 청년의 아름다운 여름날을 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책)
자연의 빛깔과 사물이 본연의 가치 또, 사람과 자연에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24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누군가는 자극적이고 빠르게 시간을 소비한다. 반면, 누군가는 자연의 흐름을 관찰하며 느리지만 차분하고 단호하게 공생, 공존을 지향한다. 찌는듯한 태양에 뭇생명들의 열기가 더해져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계절인 여름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 황홀한 사람 / 아리요시 사와콰
1972년에 발표돼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나이듦과 치매, 간병과 여성 문제를 다룬 일본 최초의 소설로 일본의 노인 복지 정책의 근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홀로 남겨져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 시게조, 아버지와 같은 노년을 살까 두려워 치매 아버지 문제를 회피하는 남편 노부토시,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엄마 아빠는 저렇게 오래 살지마“라고 말하는 아들 사토시. 이 세 사람 사이에서 직장생활, 살림에 돌봄까지 떠맡게 된 아키코.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 와닿는다.
※ 귤다방은 제주시 조천읍 곱은달서길 115에 있어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려 있는데 수요일은 쉬어요.
화덕이 운영되는 봄, 가을, 겨울에는 쫀득이와 고구마를 구워 먹는
체험도 해볼 수 있어요.
겨울 한정 붕어빵도 판매가 된답니다.
귤철에는 귤따기 체험도 합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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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의_탄생]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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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의_탄생] 너를 열렬히 응원해
- [책방의_탄생] 떠나면 알게 된다, 돌아갈 곳이 있음을
- [책방의_탄생] 지금만이 진실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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