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호근동은 중산간에서 해안으로 길게 뻗은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엄마처럼 앉아 있다. 해안가는 돔베낭골이 특히 유명한데, 돔베낭골은 제주올레 7코스의 비경으로 꼽힌다. 지난 2019년에 책방 한곳이 이 마을에 문을 열었다. 강시영, 현순안씨가 꾸리는 ‘인터뷰 책방’이다.
호근동은 현순안 책방지기의 고향이다. 책방을 열기 일 년 전쯤 강시영 책방지기가 퇴직하면서 순안씨의 고향에 둥지를 틀었다. 어릴 적 봐왔던 고향의 모습을 지금은 많이 찾기 어렵지만 특유의 편안함은 여전하다.
귀향 무렵,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책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부는 워낙에 책을 좋아한다. 이곳은 내가 지금까지 취재한 책방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상가건물 2층에 자리해 있는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즐겁다. 우편함 모양의 소품엔 책과 관련된 문구들이 적혀 있다. 계단 벽면엔 책방의 성향을 보여주는 행사 포스터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초록초록한 식물들은 책방을 향하는 길에 싱그러움을 전한다.
출입문을 열면 다양한 책들과 계단에서 마주쳤던 것보다 훨씬 큰 화분들이 반겨준다. 책장 주변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몇 곳에 나눠 준비돼 있다. 이곳은 카페를 겸하고 있어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는 여유는 누릴 수 있다. 카페 겸 계산대 역할을 하는 옆으로 12인용 탁자가 놓여 있다. 그곳에선 주로 강연이 진행된다.
기자 출신인 이 부부는 도내 한 일간지에서 근무했다. 부부는 책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두루 읽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주로 많이 읽는 것은 인문서적이고, 제주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 애정을 갖고 읽는다고.
부부의 성향이 엿보이는 서가엔 그래서 제주 코너가 별도로 있고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은 물론 예술, 환경, 사회, 과학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있다. 여러 장르를 두루 갖춰놓은 것은 부부의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을 어떤 분들이 찾을지 모르니 다양한 취향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책방엔 책 뿐만 아니라 눈을 두는 곳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분이고, 다른 하나는 창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으로 호근동 풍경이 들어온다. 특히, 압도적인 것은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제주의 바다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좌석엔 방명록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책방의 특징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꺼내 읽어 봤다. 공통된 단어들이 몇 눈에 띄었다. ‘위로’, ‘공감’, ‘치유’, ‘쉼’ 등이다. 그리고 대게 글의 끝은 ‘인터뷰 책방이 있어서 고맙고 힘이 납니다.’였다.
책방을 다니면서 공간의 힘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책방을 찾았을 이들은 책도 책이지만 그곳 자체에서 힘을 얻고 간다. 특히, 인터뷰 책방에서 유독 치유와 공감, 위로를 얻었다면 그것은 책방의 이름 덕도 있을 것 같다.
인터뷰(Interview,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가지는 회견). 사전적 의미는 딱딱하지만 이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질문하는 이가 있고 답변하는 이가 있는 장면이다. 책방을 찾는 이에게 질문하는 이는 누구일까? 책방지기는 손님이 편안히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한다. 그러면 남는 사람은 손님 혼자뿐이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했지만 그동안 묻지 않았던 질문들을 한다.
‘지금 너는 왜 지쳐 있니, 언제부터 이랬니, 네가 원하는 너의 모습은 어떤 거니,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니.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할거니, 기운은 있니? 어떻게 하면 기운이 날 것 같니?’
홀로 또는 가족 여행을 온 이들, 동네 주민, 권태감을 느끼는 부부, 성인이 돼서도 성장통을 겪고 있는 청춘들, 엄마·아빠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나로 살아온 세월보다 긴 사람들 또, 인생의 황혼기를 거니는 사람들 등. 이들은 스스로에게 그런 숱한 질문들을 마음속으로 던지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울퉁불퉁한 곳을 펴냈다고 방명록에서 고백하고 있다.
읽다보면 글을 쓴 이의 고민뿐 아니라 실은 그것은 나의 고민이고 우리의 고민이라는 보편성을 깨닫게 된다. 개인이 어느새 우리가 되는 놀라움. 이 공간은 그렇게 개개인에 집중하게 하면서 모두의 안위를 두루 살피는 힘이 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멈췄을 때, 이곳에선 마을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엽서 그리기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어르신들의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는 어르신들에게 무료함을 더했다. 경로당도, 마을회관도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층 적적해진 그분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한 차례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웬걸, 그날 프로그램에 참석한 어르신들의 열의에 수업을 연장하다 보니 열 차례 넘게 수업을 진행하게 됐다.
참여한 이는 모두 6명. 호근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어르신들로 평균 나이 당시 81세다.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하시거나 농사일에서도 이제 물러나신 어르신들. 그림이라고는 평생 그려보신 적이 없고 일기도 써 본 적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림을 그리셨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에 견주어 보면 강산이 8번이나 바뀐 그 긴 시간을 회상하던 그들은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80년의 시간에는 정말 많은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빛나던 때, 외로웠던 때, 깊은 슬픔에 빠졌던 때, 다신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에 사로잡혔을 때, 이보다 더 즐거울 순 없을 것처럼 행복하던 때.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낸 또는 견더낸 그분들에게서는 어떤 초연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세울 것 없고 자랑한 것 없는 그래서 아쉽기만 인생을 사셨다고들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웃으며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보다는 즐겁고 행복한 시절들이었다.
수업 시간만큼은 소년, 소녀가 되는 어르신들을 보는 일은 여기 책방지기와 강사로 참여한 이에게도 잊지 못할 귀한 경험이었다. 그림책 강사는 제주시에 거주했는데 재능기부로 첫 수업에 왔다가 매주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오갔다. 어르신들의 열정과 정성, 애정이그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그 시간들이, 그 수고로움이 오히려 기뻤다고 회상했다.
어르신들은 물론, 강사와 책방지기까기 모든 이들의 정성과 감동의 마음이 담겨 그림책 <디어 마이 호근동>이 탄생했다. 여섯 명의 어르신은 어린시절을 회상하기도 했고, 젊은 시절의 한 단편을 소개하기도 했다. 프랑스가 낳고 한국이 길렀다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나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입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p. 85)
개개인의 이야기지만 호근동을 떠나지 않았던 이분들의 이야기는 오롯이 호근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한 권은 구술사의 가치를 지닌 귀한 자료란 의미다.
그림책 작업이 어르신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어르신을 모시고 북 토크 콘서트를 하고 싶어하는 곳들이 생겨났다. 늘 말벗이 그리웠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시면서 어르신들은 어쩌면 살아오면서 미처 위로하지 못했던 것들을 위로하고 화해하는 순간을 가지지 않으셨을까?
『디어 마이 호근동』의 선풍적인 인기는 옆마을에도 좋은 영향을 줬다. 지금은 이웃마을 도순리에서 책방이 주최하는 두 번째 마을어르신그림책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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