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요행)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사진=요행)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아직도 가기가 아쉬운가 보다. 한낮엔 가벼운 산책에도 땀을 훔치게 된다. 반면, 가을은 곧 더위를 잠재우겠다며 아침저녁으로 쌀쌀맞은 바람을 불어댄다. 아침과 저녁엔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것 같다가 한낮엔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는 듯 세 계절을 묘하게 오간다. 그러고 보니 계절은 늘 맺고 끊음이 명확하지는 않았다. 항상 계절의 한가운데 들어서야만 알게 된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준인 ‘계절’의 구분이 선을 그은 듯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과거라는 것, 그러니까 추억이라 부르는 것 역시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어떤 계기가 있어야 환기될 뿐. 원도심이 바로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숨 쉬는 곳이 아닐까? 

80~90년대 제주 최대의 번화가였던 제주시 원도심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소프트웨어는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는 중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복덕방이던 곳은 슈퍼로, 슈퍼에서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몇 해 전부터 급속도로 번진 ‘레트로 열풍’으로 오래된 다방과 여관은 세련미를 가미한 카페로 변신했다. 자신의 매력을 한껏 살린 책방 또한 원도심 곳곳에 자리해 있다. 

책방 책가방은 3년 전 제주시 원도심에 둥지를 틀었다. 집과 가까운 곳에 가게를 구할 겸 돌아다니다가 일도2동에 마침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이전에는 세탁소였다가 한때는 피부관리실이었던 비어 있는 그 공간에 그는 자신만의 책방 밑그림을 그렸다.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내부는 레트로 콘셉으로 꾸며져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내부. 생활감 있는 궤 안에 소품들이 진열돼 있다. (사진=요행)

책 못지않게 문구류와 소품을 좋아하는 김미화 책방지기는 레트로 코드와 잘 맞았다. 벽에는 모두 흰 페인트를 칠했다. 책장이며 간이 테이블은 집에 있던 것을 가져오거나 이전에 사용하던 것 그래서 생활감이 무척이나 밴 것들로 일부러 골라 들여왔다. 생활감이라는 것이 1~2년의 생활감이 아니다. 못해도 50~60살은 돼 보이는 궤, 20년은 쓴 것 같은 1인용 독서실 책상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정면에 보이는 빨간 옛날 책가방은 80년대생에게도 눈에 익을 뿐 써본 적은 없는 과거의 물품으로 ‘레트로’ 콘셉트에 정점을 찍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단을 올라야 하는 구조다. 보통 ‘신발을 벗고 들어오세요’란 안내 문구가 씌여 있는데, ‘신발을 신으셔서 들어오셔야 돼요’란 당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신발 때문에 고민을 하는가 보다. 

책방 이름인 책가방은 ‘책이 가득한 방’의 줄임말이다. 80~90년대 동네 언니들의 방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언니의 방 한 켠, 책을 좋아하는 다른 언니의 방 한 켠, 그림을 좋아하는 또 다른 언니의 방 한 켠 등을 보기 좋게 섞어 놓은 모습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있는 것들로 채운 그 방에서 각자의 미래를 설계하고 숱한 꿈들을 꾸었겠지. 그리고 이곳을 찾는 이들도 이 공간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미래의 방향을 재정비 하는 등 저마다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이다.  

보유하고 있는 책은 대략 500권이다. 리퍼북, 중고책, 그림책, 신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신간은 위아래로 긴 책장에 있고, 그림책과 리퍼북, 중고책은 각각 따로 분류돼 있는데 키가 매우 작은 궤에 들어 있거나 장바구니 등에 있어서 앉기도 해야 한다. 그게 번거롭다기보다 그렇게 앉아서 책을 보다 보면 주변에 소품들에 또 시선이 빼앗긴다.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내부. 독서실 책상이 준비물 문방구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요행)

책방지기는 소품에도 큰 공을 들이는데 여행길에서 산 문구류, 찻잔 세트, 액세서리 등이 비치돼 있다. 이 모습이 꼭 학교 옆 문방구 같은 느낌을 풍긴다. 학교 옆 문방구라는 곳은 학용품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이 좋아할 웬만한 것들을 두루 갖추곤 한다.

수십 종의 펜과 연필, 수첩, 노트와 각종 머리끈과 팔찌, 목걸이, 가방과 지갑 같은 잡화류, 양말과 무릎담요, 화분, 연예인 포토 카드, 미니 오락실, 과자, 음료수... .... 일일이 열거하면 끝이 없을 만큼. 여하튼 학교 옆 문방구는 대단한 곳이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그런 곳. 

10대에서 20대까지 내 최애 공간은 문방구였다. 그곳에 있는 각양각색의 상품들을 구경할 때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주머니가 넉넉지 않은 학생이 적당한 가격에 좋아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데다 ‘나의 것’이란 소유욕을 채울 수 있어서 나에겐 당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곳이었다. 문방구는 물건도 자주 바뀌어서 신상이 들어온 날은 더욱 신났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의 그 감흥을 이 책방이 불러일으킨다. 책방 책가방에서는 소품을 구경하는 것에도 시간을 꽤 쓰게 된다.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책방지기가 쓴 메모지가 책만큼 많다. (사진=요행)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책방지기가 쓴 메모지가 책만큼 많다. (사진=요행)

메인 서가에는 책방지기가 좋아하는 책들과 주요 서점에서 잘 나가는 책들이 골고루 마련돼 있다. 책만큼이나 메모지가 많다. 책을 읽은 책방지기의 소감을 짧게 적어 놓았다. 책을 고르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다. 메모지를 하나 하나 읽은 재미가 있어서 사실 이 서가에서도 역시 한 차례 시간을 꽤 보내게 된다. 참 볼 게 많은 책방이다. 

새 펜과 노트를 보면 어떤 가능성을 얻는다. 어떤 것들로 이 노트를 채울지.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에 설렘이 추가된다. 책들을 보면 또 다른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책을 만나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며 깨닫게 될까. 책방 책가방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게 함과 동시에 앞으로 달라질 나의 모습을 기대하게 하는 묘한 곳이다. 

벽면을 채우는 건 알림 문구가 10%, 나머지는 미술 작품이 걸려 있다. 누군가 마음을 쏟아 그렸을 그림들은 제주의 모습을 담고 있거나 어떤 사람의 얼굴 또는 동물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이 그림들은 김미화 책방지기의 작품들이다.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내부. 각종 소품과 김미화 책방지기가 그린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내부. 각종 소품과 김미화 책방지기가 그린 미술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요행)

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림엔 좀체 자신이 없었던 미화씨였다. 콤플렉스로 여길 만큼 그림 그리기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그것을 깨부수고 싶단 생각에 다시 캔버스 앞에 섰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을 책방 벽에 걸어뒀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인 손님이 그 그림을 꼭 사고 싶다고 한참을 조르는 일이 있었다. 

스스로의 그림에 자신이 없었던 때여서 판매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만 손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팔 생각이 없었기에 가격 책정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미화씨는 재료값만 받고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팔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뒤 미화씨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미화씨의 그림이 취향인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고 지금은 판매도 하고 있다. 책방에 들어서면 그림들에 가격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책가방에서는 책도 사고 그림도 살 수 있다. 

그는 사실 직업이 여러 가지다. 책방지기면서 수필을 쓰는 작가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책을 통해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담가이자, 미술교육을 지도하는 선생님이다. 책가방의 맨 안쪽엔 ‘88예술소 클래스 룸’있는데 그곳이 책방지기의 작업실이다. 그곳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상담을 하고 그 외 또 여러 활동을 한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책방지기 
제주시 일도이동 소재 책방 '책가방' 책방지기 김미화씨가 책 한 권을 펼쳐 보고 있다. (사진=요헹)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