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었다. 책방지기를 만나기로 한 날 하루 전, <제주투데이>를 보고 있다가 새롭게 시작한 칼럼 '부부해방전선'을 읽었다. 삐리용님의 글이었다. 배시시 웃게 하는 마력의 글에 푹 빠져 맨 끝까지 스크롤을 내렸을 무렵, 필진의 정체를 알게 됐다. 만나기로 한 책방지기 부부였던 것. '책방의 탄생' 칼럼을 연재하면서 필연 같은 우연들을 종종 경험하고 있다.
'부부해방전선'은 현재 프롤로그와 삐리용의 1편까지 총 2회 발행됐다. 다음 차례는 노지다. 부부는 이전에 '한뼘읽기'라는 칼럼을 격주로 연재했었다. 삐리용의 짝꿍인 노지가 바로 조은영 책방지기다.
이 칼럼의 방향성은 ‘책 속 산책담’이다. 서평보다 친근한 수다 같은 책 소개글로 읽다보면 ‘오~ 이 책은 나도 좀 읽어보고 싶은데?’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부부는 책을 소개하는 잡지를 펴냈던 경험이 있다.
도서출판 텍스트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부부의 보금자리는 서울이었다. 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둘은 책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고, 뜻이 맞는 지인 두어 명과 함께 소규모 출판사를 차렸다.
당시는 영화 관련 잡지가 잡지계에서 주류를 이룰 때였다. 부부는 책을 소개하는 잡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북리뷰 도서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웠기에 문학, 인문사회과학 등 출간하는 책의 장르를 넓혔다. 그 출판사의 이름이 <도서출판 텍스트>다. 10년 정도 운영을 하다가 휴업을 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폐업 수순을 밟게 됐다고.
<도서출판 텍스트>는 이제 사라진 상태다. 하지만 책방 메인 서가의 맨 위 칸엔 흔적이 남아 있다. ‘월간 북 매거진 텍스트’, ‘스피노자’, ‘작은 것은 가능하다’, ‘완전한 여성’, ‘한나 아렌트 저작선 라헬 파른하겐’ 등. 이 출판사가 펴낸 책 일부가 전시돼 있다.
절판되었기에 판매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책 중 일부를 대학교 교재로 삼고 싶다는 연락을 받는다고 한다. 좋은 책을 볼 줄 알았던 부부의 혜안에 감탄하면서 한 편으론 대학교재로 삼지 못한 교수와 제자들의 처지가 안타깝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생 소년 손님이었다. ‘한나 아렌트’에 관해 수업 시간에 배웠다며 이후부터는 소위 그녀의 책을 ‘도장깨기(유명한 도장을 찾아가 그곳의 실력자들을 꺾는 것처럼, 특정 분야에서 어려운 장벽이나 기록 따위를 넘는 일)’하고 있다면서 한나 아렌트의 책을 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비판매용으로 전시한 책 한 권을 눈빛이 초롱초롱한 소년의 내일을 응원하면서 손에 쥐어줬다.
<도서출판 텍스트>에선 한나 아렌트뿐만 아니라 세상에 메시지를 던진 여성들을 소개하는 책들을 많이 출간했다. 은영씨에게 출판사를 정리한 것이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는지 물어봤다. '휴업기간에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자연스레 이렇게 흘러왔다'는 담담한 답변이 돌아왔다. 좋은 책을 만드는 일도 사랑하지만 지금은 세상에 있는 여러 다양한 책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판매하는 것에 더 끌린다고.
책방이란 공간에 대한 신뢰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 손님이셨다. 그에겐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손녀가 있는데 사춘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손녀에게 말을 걸면 튕겨 나오기 일쑤. 손녀와 잘 지내고 싶으셨던 할아버지는 한뼘책방에 들어와 책방지기에게 ‘당신이 책방 주인이니 그 아이를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눠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청했다고. 이것이 힘들다면 ‘아이가 자신의 말은 듣지 않아도 책 읽는 것은 좋아하니 내가 아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면 아이가 읽을 좋을 책을 몇 권 추천해달라'고 하셨다.
은영씨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는 사회 분위기는 아닐지언정, 책방 주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겐 조금 무턱댄 신뢰감 같은 것이 있음을 깊이 체감했다고 했다. 책을 가까이하고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처음 보는 사이에도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고민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책방이란 공간의 역할과 책방지기의 역할. 앞서 소개한 두 개의 에피소드는 책방이 동네 곳곳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증명한다. 은영씨는 현대의 책방은 사람들과의 소통이나 교류의 거점이 되는 장소라고 말한다.
한 공간이 특정한 동네에 오래 있으면 자연스레 주어지는 역할이 있다. 과거에는 동네 슈퍼마켓이나 복덕방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 왔다. 이젠 여러 문화 프로그램을 주최하고 세상의 다양한 소식을 책으로 전하는 동네 책방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는 의미다.
은영씨는 ‘한뼘책방'이 이 골목 풍경의 일부가 돼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무르길 꿈꾼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책방이 아무리 규칙이 많고, 협소한 곳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세상을 향해 열려 있을 수 밖에 없는 곳’이기에 ‘물리적 공간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책은 구매 후 읽어주세요
‘책은 작가와 서점의 생계입니다! 구매 후 읽어주세요!!’
한 달 전쯤 책방에 안내 문구가 새로이 걸렸다. 안내 문구를 걸까, 말까 고민만 했지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드디어 용기를 낸 것이다.
예전에는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만큼 ‘책을 읽는’ 행위와 읽고자 하는 욕망에 크게 의의를 뒀다. 당시엔 그런 모습이 학구열과 짝을 이뤘다. 숭고함까지 느껴지는 것으로 여겨져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책이 너무나 귀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책의 종류도 양도 방대하다. 인터넷 서점, 오디오 북, 전자책, 도서관, 동네 책방 등등 마음만 먹으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역시 폭이 넓다. 책을 쓴 저자와 판매하는 이들에 대한 가치와 예의는 그와 함께 성장하지 못했다.
카페를 겸하는 책방이다 보니 북카페로 오인해 허락을 구하지 않고 책을 펼치는 손님도 있다. 꾸준히 와서 식사나 음료를 주문한 뒤 며칠에 걸쳐 책을 완독하는 손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팔아야 할 상품인데 보는 과정에서 훼손하는 일도 있다. 이런 일들이 4년여 동안 벌어지니 더이상은 그 일들을 묵인할 수가 없게 됐다. 비단 한뼘책방만의 애로사항이 아닌지라 캠페인을 하는 마음도 덧붙여 만든 안내 문구다.
빵과 커피 : 근사한 책들 사이의 여유
이곳에서 베이커리는 남편의 영역이다. 커피를 내리고 책방을 운영하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책방에 들렀다고 해도, 카페에 들렀다고 해도 어느새 책방을 둘러보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곳은 문학 장르가 주를 이룬다. 예술과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도 볼 수 있다. 책방지기가 읽고 싶은 책 40%와 독자들이 선호하는 책 30% 비율로 구성돼 있다는데 비밀의 책도 한켠에 있다.
책방지기의 남편은 손글씨에도 소질이 있어서 책 소개글을 손수 작성한다. 비밀의 책 소개글에 마음이 홀려 나도 2권을 샀고, 흡족한 마음을 얻었다. 이 부부의 마음을 끄는 책,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책을 살펴보니 참 따뜻하다. 뜨겁지 않은 딱 적당한 만큼의 온기. 봄날의 햇살같이 보드라운 포근함을 누릴 수 있는 곳. 그 따스함이 여러분에게도 스미기를.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소설
소설 <모비 딕>으로 잘 알려진 작가 허먼 멜빌은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다. 이 소설은 당시 변호사 사무실이 많았던 월스트리트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시작한다. 출근한 지 사흘 만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바틀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보는 이의 관점과 주 관심사에 따라서 ‘획일적 사회에 대한 거부’, ‘주체적 자아의 확립’, ‘고립과 소외’, ‘노동운동’, ‘허무주의’ 등으로 읽힐 수 있을만큼 다양한 메시지를 전한다.
책방지기 부부는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말이 만연한 사회에서 ‘안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사회 분위기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사회에 적응하고 타협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말하며 이 책을 추천했다.
※금요일의 아침, 조금과 한뼘책방은 한 공간을 나눠 쓰는 곳으로,
제주시 가령골1길 12에 있어요.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문을 열고요.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에요.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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