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주제넘은 서점'. 1층 한켠이 책방이고 나머지는 가족 공간이다. (사진=요행)

연화못과 돌담의 마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연화못을 마주한 곳에 3평 규모의 방 한 칸짜리 책방이 있으니. 바로 ‘주제 넘은 서점’이다. 이곳의 책방지기는 김문규씨다. 그는 코로나19가 세계를 장악하던 지난 2020년 2월 책방 문을 열었다. 

코로나19는 오랜 꿈을 실현하는 데 큰 변수가 되지 않았다. 10년의 꿈, 어쩌면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 전부터 내면에 잠재돼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꿈. 책방의 탄생이었다.

 

주제넘은서점의 김문규 책방지기. (사진=요행)

 

TV와 맞바꾼 독서의 쾌락 

김문규씨는 가족과 함께 약 17년 전 제주로 이주했다. 뭍에서의 삶은 너무 빨랐고 치열했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제주의 삶을 동경하던 차에 이주를 마음먹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제주시내 한복판에서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다른 점도 있었다. 퇴근 후에 할 일이 없다는 점. 

서울의 밤은 무척 짧았다. 늘 만날 사람이 있었고 일주일에 3~4번은 술자리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는 제주의 밤은 너무 길어서 퇴근 후 할 일이란 TV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목적도, 의미도 없이 TV만 보던 날들은 무기력을 얹었다. 이러려고 택한 제주행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단한 것이 집안의 TV를 없애는 것이었다. TV가 없으니 일상이 한층 더 지루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내와의 대화가 조금씩 길어져 갔다. 아이들과도 깊은 대화를 거리낌 없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 남은 시간은 책을 읽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겸 시작된 독서는 꾸준히 이어졌는데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하루 평균 6시간 정도 책을 읽게 됐다.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구입했다. 서점에서 서성이는 시간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책을 왕성하게 읽으니까 처음에 흥미를 끌었던 주제의 책들을 거의 섭렵하다시피 하게 됐다. 뭔가 다른 시각의 책을 찾고 싶어졌고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았을 법한 책들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이전에 관심이 없던 책들을 읽으면서 제3의 눈이 떠졌달까. 책을 통해 독특하고 다양한 시각을 만나면서 그의 견해는 확실히 넓혀졌다. 어느새 카테고리별로 그의 마음 속 도서 목록도 생기게 됐다. 책 읽기의 기쁨과 책이 열어주는 다양한 세계를 혼자만 아는 것에 안타까움이 생겼다. 

그쯤 집에 책이 너무 많았다. 처음 제주로 이주할 때는 책이 약 200권 정도였는데 집 한쪽이 온전히 책의 차지가 됐다. 책을 기부하는 것도 한계가 있던 차에 막연히 품고 있던 책방지기의 삶을 현실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짓고 한 켠에 책방 겸 문규씨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의미 있는'을 주제로 선정된 책들. (사진=요행)

 

주제 좀 넘겠습니다

김문규씨 부부는 신제주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꽤 이름 있는 곳으로 규모도 크다. 문규씨는 책방을 운영하면서도 자신의 본업은 학원 운영이라고 했다. 책 판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감성과 사고를 가진 이들과 책이 있는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오전에 딱 4시간만 문을 연다. 그 시간은 문규씨가 책을 읽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손님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책을 읽으니 손해 볼 일이 하나 없다고 한다. 또, 구비해 놓은 책을 팔면 좋고 못 팔면 자신이 읽으면 그만이라고도 덧붙인다. 도서관과 책방의 중간 성격의 장소라고 표현하면 좀더 이해가 쉬울까. 

“책방이지만 손님을 중심에 두는 곳이 아니니 일반적인 책방에 비하면 주제 넘죠. 이곳은 철저히 제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서 운영돼요. 저도 오후나 심야 책방을 열고 싶은데 생업이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이곳이 생업이 되면 매일 적자일텐데 그렇게 되면 늘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마 문을 닫게 될 겁니다.

이곳은 제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다행히 오시는 분들은 오전에만 운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찾아주세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이곳이 그렇게 대단한 곳이 아닌데도 큐레이션을 보고 찾아와 주시고 머물다 가시니 그게 보람이에요.”

본업이 책방지기가 아니면서 책방을 연, 주제를 넘어선 일. 김문규 책방지기는 삶이 바뀌려면 그런 주제를 넘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주제넘은서점의 큐레이션 주제. 지금 주제는 '의미 있는'이다. (사진=요행)
'의미 있는'을 주제로 선정된 책들. (사진=요행)

‘주제넘은서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서 소개한 ‘화자의 처지’와 또 하나는 ‘내용의 중심’이다. 문규씨는 다양한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설정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자신의 주제를 계속해서 넘으면서 지금도 성장하는 중이다. 그러니 책은 자신의 처지를 넘게 하는 주제 넘는 수단이다. 

내용의 중심으로써의 ‘주제’도 넘고 있는데 간헐적으로 책방 큐레이션의 주제를 바꾼다. 처음엔 ‘변신’이 주제였다. 그다음엔 ‘시간은 흐른다’를 주제로 꽃의 시간, 차의 시간, 목수의 시간 등등 시간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보았다.  

지금은 ‘의미 있는’이 주제다. 의미 있는 긴장감, 의미 있는 사랑, 의미 있는 소설, 의미 있는 슬픔, 의미 있는 자기 계발, 의미 있는 실패 등등.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종류의 소주제로 책을 골라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면서 새로운 ‘의미 있는’ 것들을 인생에 들여놓는 것을 권하는 큐레이션이다. 

쾌락 독서가로서 철저히 독자의 입장에서 큐레이션한다. 잘 팔리는 책을 전시하면 판매자의 입장에서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문규씨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독자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릴 수 있는 책을 통해 손님들의 삶을 바뀌기를 바란다. 자신이 그랬듯 책을 통해 스스로 주제 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물에서 사는 곤충인 물장군은 한 번의 뛰어오름으로 잔잔했던 연못의 이 끝과 저 끝에 파장을 전한다. 책은 물장군이다. 한 권의 책은 내 마음의 끝과 끝에 또, 내 인생의 나날들에 파장을 전한다. 그 한 권의 책을 만나게 하는 일. 

이곳은 내 삶의 주제를 자꾸만 생각해 보게 한다, 또, 앞으로의 방향 설정을 점검하게 한다. 책을 매개로 내 삶에 관여하다니 이곳, 정말 주제를 세게 넘는다. 그런데 그 참견이 왜 고마울까?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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