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쏟아졌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푸르른 나무나 파아란 하늘에 비길 수 없을 만큼 맑고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갈 때 절로 피어나는 표정이리라. 잠시 스쳐 지나간 아이들의 해맑음에 모났던 마음이 차분히 정돈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대흘초를 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또 하나의 풍경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바람결에 노란 잎을 떨구며 마을 길의 경계를 나누는 커다란 팽나무 한 그루. 한 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두꺼운 줄기 둘레에 넓게 뻗은 나뭇가지, 그리고 그 끝에 숱하게 달린 나뭇잎. 지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지정 당시 수령이 360년, 그러니까 지금은 400살 된 나무다.
단 한 그루의 나무는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그 기나긴 세월, 숱한 비바람에도 자신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은 틀리지 않았다고. 바람이 불면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고. 그것은 버티는 것보다 상황에 적응하고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팽나무 한 그루는 나에게 무수한 말을 전했다.
책방은 이 팽나무를 지나쳐 마을 안의 귤밭으로 가면 만난다. 다소 외진 곳에 지어진 현대식 2층 건물과 그 옆의 귤밭, 귤다방이다. 동네책방이라고 하기엔 다소 규모가 큰 편이다.
책방지기인 강선미씨는 올해 이주 14년차인 제주도민이다. 결혼하면서 제주에 왔고 두 아들을 낳아 남편과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다. 이 귤밭은 시부모님이 물려주셨다. 귤나무의 수령은 약 50년. 남편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시부모님은 이 귤밭을 가꾸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부모님 입장에선 반평생 넘는 시간이, 선미씨 남편의 입장에선 거의 평생의 추억이 벤 곳이다. 부모님이 연로해지면서 귤밭 운영이 어려워졌다. 선미씨는 가뜩이나 귤밭이 사라지는 제주에서 시부모님이 정성으로 가꿔온 이 귤밭을 처분할 수 없었다. 오히려 꼭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귤을 수확해 판매하는 것은 선미씨에게 막막한 일이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귤밭을 체험농장으로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체험농장을 하려면 아무래도 체험객들이 쉴 공간이 필요했다. 그는 그 공간에 1순위로 책을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심과 떨어진 중산간 마을이라 책을 구하려면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제주 시내로 나가야 했다. 이때문에 마을 아이들과 주민들은 책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렇게 ‘귤다방’이란 책방의 씨앗이 뿌려졌다.
귤밭엔 오래된 농가가 있었다. 가족들의 정이 많이 깃든 집이었다. 어렵던 시절 시어머니가 손수 짓고 수시로 보수해서 손때와 시간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태풍이 한 달 사이 몇 차례 들이닥쳤던 때 큰 비비람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크게 훼손됐다. 다시 손을 대는 것이 더 일이었다. 과감하게 귤밭 한 켠의 나무들을 치우고 그곳에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1층은 상가이고, 2층은 가정집이다. 책방지기는 1층에 책방을 열기로 마음을 다잡게 됐다. 그렇게 2021년 9월 17일에 책방 문을 열었다.
책방 내부는 꽤 복합적이다.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은 옷과 가방 등이 정돈돼 있고, 왼쪽엔 피아노가 놓여 있다. 그리고 피아노 옆을 따라서 책들이 진열돼 있다. 서가를 마주한 탁자엔 작은 소품들이 놓여 있다. 서가가 끝나는 곳은 정면에서 바로 보이는 카운터고, 카운터에선 간식거리가 있다. 카운터 왼편은 큰 창문인데 귤밭으로 향하는 문이다.
문밖으로 나가면 귤밭이 너르게 펼쳐지고 한켠에 캠핑장을 연상케 하는 쉼터가 있다. 어느 하나 예사롭지않는 이곳엔 동물이 참 많다. 감귤나무를 좋아하는 염소 3마리와 앙증맞은 입으로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토끼들, 밤이면 귤밭에서 산책을 즐긴다는 닭들, 그리고 ‘금’이라 불리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까지. 어릴 때 자연 속에서 자랐던 남편이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서 동물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족 모두가 동물을 좋아해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책방이면서 귤밭이면서 옷가게이면서 야외체험장이면서 편의점이기도 한 이곳. 책방 이름이 ‘귤다방’이 된 것은 다방처럼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오가고 정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책’과 ‘귤’을 매개로 일상에 쉼표를 찍고 호흡을 다듬기를. ‘나’만 쉴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같이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바란다. 이후에 소개하겠지만 이 공간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선미씨는 책을 좋아하지만 다독가는 아니라고 했다. 편식도 좀 있는 편이라 큐레이션에 딱히 자신은 없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읽어본 책 중에 인상 깊고 사람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책들을 선별했다고 했다. 산문과 소설을 좋아해서 수필, 소설류가 많다. 살다보니 건축과 정원에도 관심이 생겨서 그에 관한 책들도 많다고. 무엇보다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 그림책이다. 마을내 또 하나의 책방인 사슴책방이 전 세계 다양한 형태와 장르의 그림책을 만나는 곳이라면, 귤다방은 조금 더 친근한 동화책 위주의 그림책이 많다.
판매책 외에 중고서적들도 있다. 판매용이 아니라 나눔용이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책방에서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비치해 뒀다.
단골손님은 동네 주민인데 일부러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손님들도 꽤 된다. 한 번은 서귀포시 표선면 주민이 왔다. SNS에서 보고 이곳에 오고 싶어서 버스를 몇 번 갈아타서 왔다가 갔다. 제주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버스로 외곽지의 목적지로 가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인지. 복잡하고 다소 긴 여정일지라도 시작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책방 귤다방에 있다.
또 이런 손님도 있었다.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 제주에 온 관광객인데 ‘제주오름지도’가 이 책방에 있다는 걸 알고 산행을 마치고 택시를 잡아타고 귤다방에 들렀다. 지도가 목적이었지만 와서 4시간을 머물며 앞만 보고 달려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고 갔다. 최근에 이 손님이 또 이 책방에 들렀다고 한다.
모르면 몰랐지, 안다면 한 번은 꼭 오고 싶거나 오게 되는 곳. 귤도 있고, 동물도 있고, 사람도 있고 책도 있는 곳. 그 모두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즐겁게 조화를 이루는 곳. 어쩌면 오래된 미래이며 내 어린 시절의 아지트 같은 곳. 이곳에선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살 때 짓게 되는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400살 된 팽나무처럼 다리를 땅에 단단히 딛고 자연에 몸을 맡겨 흐르는 대로 살 용기가 생긴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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