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하고 무슨
할 이야기가 많은지
흔들흔들 억새도
수군수군
한들한들
가을 옷 갈아입은 강아지풀도
소곤소곤
살랑살랑 들국화도
재조잘 재조잘
가을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랑잎도
가랑가랑 할 말 있다고
길 건너 뛰어 온다.
- 김정희 동시, <가을 이야기> 전문
하루가 다르게 아침, 저녁 공기가 달라지고 있다. 제법 시원하다. 신문에서 중산간에 억새가 피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제 여름은 끝자락에 와 있고 가을은 코 앞에 와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계절감을 알게 해 준 것은 오늘 아침의 억새와 아침저녁의 시원함이 아닌 한 편의 시였다. 앞서 소개한 <가을 이야기>는 오늘 소개할 동시집 전문 책방의 이름이자, 동시집인 <오줌폭탄>에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제주의 사계절과 함께 여러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동시가 실려 있다. 계절감이 돋보이는 시들이 내가 잊고 있던 감각들을 깨웠다.
그동안 ‘살랑살랑’한 바람 한 줄기, ‘흔들흔들’ 거리는 녹음 짙은 나뭇잎들, 조금은 시끄럽지만 자기들끼리는 ‘수군수군’대는 중인 매미들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 모든 지금을 살고, 살아내고 있는 생명의 소리들을 모른 척 할 수 있었다니 태양의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고 탓 해본다.
이 책방을 찾아 나선 날은 말도 안 되게 더운 날이었다. 오전 6시에도 30도를 웃돌던 그런 날이었으니 말이다. 해변에 인접한 동네는 오전 10시가 넘었는데도 꽤 조용했다. 가끔 오가는 렌터카와 관광객이 주변의 공기에 살짝 파장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언뜻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키 낮은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들 때문일 것이다.
이 책방 주변의 담벼락엔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가득하다. 책방을 찾은 아이들이 직접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 너른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자신들의 생각을 풀어냈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때의 그 웃음소리가 그림에 그대로 담겨서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전해지는 것 같다. 이 벽화는 ‘동시로 올레’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지금도 프로젝트는 진행형이다. 책방을 중심으로 인근 담벼락을 아이들의 그림과 시로 채울 것이라고 한다.
아이가 돌아오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책방의 이름 ‘오줌폭탄’의 책방지기는 시인 김정희씨다.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출생인 그는 시인이면서 시낭송가, 동화구연가, 문학놀이아트센터 대표다. 또, 제주문인협회와 제주아동문학협회, 한국동시문학회, 한라산문학 동인 등에 속해있고 제주어보전회 회원이다. 정말 바쁘고 부지런히 사는 분이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고향집에 자리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에 2017년 8월 15일 책방 문을 열었다. 결혼 후에 제주시내에서 살던 그는 2000년도에 하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연 아동문학가의 길로 들어섰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라 가세가 기울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모든 일을 내려놓고 아동과 관계된 자격증 취득에 몰입했다.
“사람이 낭떠러지로 떨어졌을 때는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올라오는 사람이 있고. 올라오고 그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후자에 속해요. 악조건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태로움 속에서 새로움을 찾아내는 힘이라니. 얼음 땅을 뚫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복수초가 떠오른다. 악조건이 제약이 되지 않고 발판이 되는 사람. 그의 마음 속에는 슬픔이나 절망이 그 자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나의 경험 정도로 분류되는 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왕성하다. 누구나 마음속에 어린아이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 어린아이를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쓴다. 그런데 그는 마음속 어린아이를 소환해 자유를 획득했다.
방과 후 아동지도사, 영어 아동지도사, 그림책 지도사, 독서논술지도사, 논술논리지도사 등 아동 관련 자격증을 섭렵하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본 적이 없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주민자치센터를 거쳐 도내 초등학교를 옮겨가며 아이들에게 제주어와 동시를 가르치고 있다. 그 와중에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7권의 책을 발간했다.
아이가, 그러니까 소녀 김정희가 어른 김정희와 하나가 되면서 이뤄낸 결실들이다. 고향집에 돌아와 유년시절의 일들을 소재 삼아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또 다른 어린이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의 씨앗을 나누는 작가. 나는 이 분외에 아직 알지 못한다.
장난기 가득하지만 묵직한 메시지 ‘오줌폭탄’
하루는 책방지기가 TV를 보고 있었다. 곤충류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다. 갑자기 생각이 ‘거미’에 꽂혔다. (참고로 거미는 곤충이 아니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대로 곤충에서 거미로 생각의 대상이 확장된 것이다.) '거미가 오줌을 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하다 나온 동시가 ‘오줌폭탄’이다.
소변에는 암모니아 성분이 있다. 발이 엄청 많은 지네가 지나다가 거미의 소변을 맞는다면 산성인 지네의 다리는 다 녹아버릴 것이다. 지네의 입장에서는 오줌폭탄을 맞는 셈이다! 거미는 별 생각없이 소변을 누었는데 누군가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한 거미가 땅에 내려오지 않고 나무에 올라가 집을 짓고 살게 됐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아무 곳에서나 생각 없는 일하면 안돼.’라며 시가 마무리 된다.
시의 내용과 별개로 ‘오줌폭탄’이란 제목은 사람들 사이에 꽤 회자됐다. 자연스레 이는 책방의 이름이 됐다. 그녀의 첫 번째 동시집 제목이자 책방의 이름. 이름 덕에 일부러 책방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책방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새로움’을 찾고자 했던 책방지기의 의지는 정말 새로운 인생을 열었고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2008년 <아동문예> 동시 문학상을, 2014년 <시인정신>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년 펴낸 제주어 동시집 <할망네 우영팟의 자파리>는 그해 하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도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펴낸 제주어 동시 그림책 <청청 거러지라 둠비둠비 거러지라>로 2019 고창한국지역도서전 천인독자상 공로상을 받았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딸로만 머물렀다면 열리지 않았을 길이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열린 길이다.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을 덧붙인다.
“어른이 되면 멋지게 살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신나게 살 거야'라는 생각을 했지요. 무엇을 하든지요. 큰 꿈을 꾼 적은 없어요.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행복하고 좋았어요. 아이들과 놀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거예요. 더 신나는 일이 없을까 찾아보곤 했지요. 그럴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행복해서 다른 사람도 행복했으면 했어요. 주머니가 조금 비어 있어도 화나지 않고, 조금 남은 주머니도 비울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따뜻한 마음으로 동시를 쓰고 싶었답니다. (...) 시간이 허락되면 오래오래 아이들과 아이처럼 생각하며 지내고 싶어요. 화가 나도 돌아서면 금방 손을 내미는 아이처럼요. 어리다고 생각을 못 하는 건 아니에요. 난 어른이어도 어른 말고 아이처럼 살 거예요.” - 김정희 동시집 <고사리손 동시학교> 여는 글 중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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