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 (사진=요행)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 (사진=요행)

창밖 너머로 오래된 성당이 보인다. 그 창문과 성당 사이에는 파란 하늘과 초록 나뭇잎이 펼쳐져 있다. 늘 푸른 5월 같은 풍경. 보는 것만으로도 코끝에 상쾌함이 밀려들고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 이 책방을 알게 된 요인이다. SNS를 통해서 책방 정보를 얻는 편인데 이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바로 이곳을 취재하지는 못했다. 반년 정도 마음에 품고 있던 때, 취재에 나서게 됐다. 때는 바야흐로 동장군이 떠나지 않고 질척이던 3월. 

제주중앙로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5분. 오래된 건물들 사이의 좁은 도로를 걷는다. 갓 스무살이 됐을 무렵 이 부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도 있던 건물들이 간판만 바뀌고 그대로라 익숙한 듯 낯설다. 한때 제주에서 가장 번성한 곳. 그때의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이지만 굳이 지나온 세월을 감추려 들지 않는 그 모습이 반가우면서 왜인지 고마운 마음이다. 

오랫동안 한의원을 했던 건물 앞에서 발을 멈췄다. 건물 맞은편은 중앙성당이다. 하늘을 지탱하듯 서 있는 십자가와 함께 울창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에서 본 것들이다. 고개를 돌려 건물 입구를 바라본다. 2층으로 올라가는 문 옆에 책방 간판이 있다. 문을 열고 좁고 다소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의 형태가 오래된 건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2층 책방 문 앞에서 신발을 갈아신는다. 손님들이 신을 수 있게 슬리퍼를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 

책방 안에 싱그러움이 출렁인다. 곳곳에 놓인 푸릇푸릇한 화분. 잘 정돈된 서가. 탁 트인 시야. 그리고 성당 방면으로 나 있는 창. 드디어 왔다. 나이롱 책방에.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의 장효정 책방지기. (사진=요행)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의 장효정 책방지기. (사진=요행)

장효정. 책방지기의 이름이다. 지난 2018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로 오기 전까지는 디자이너였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고 하면서도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갔다. 회사에 소속돼 있다보니 여러 제약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발전이 없이 멈춰 있는 기분. 이런 기분에 사로 잡힐때면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푸른 수평선, 해가 떨어질 때쯤 붉게 물드는 하늘, 밤바다에 떠 있던 별조각 같은 집어등. 낮과 밤의 경계는 확실했고 어디든 통과하는 바람이 마음의 빗장을 열어 근심까지 털어내 주던 곳. 제주는 그에게 이전에 경험해 보지 않았던 포근함을 주었다. 이런 생활을 지내던 어느 날 TV에서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방을 만족해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순간, 그는 행복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저렇게 아무것도 없이 살 수 있는데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구나.’  

그때부터였다. 처음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처분했다. 하지만 이내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로 의미가 확장됐다. 17년의 직장 생활도 놓았다. 서울에서의 삶도 놓았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생활용품이 남았다. 그런데 책만은 줄지 않았다. 

함부로 버리거나 나눠주거나 되팔 수가 없었다. 장효정 책방지기의 삶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을 버리고 나니 본인과 책이 남았다. 그것을 가지고 몸과 마음이 가장 편했던 제주로 왔다. 다음 직업은 책과 관련된 일을 하리라 생각했다. 

제주시 삼양동에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했다. 하나씩 차근차근 자신답게 실내를 꾸몄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뜻대로 척척 진행되지 않기도 했지만 스스로 한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을 누를 만큼의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렇게 삼양동에서 2018년 9월 ‘나이롱 책방’이 문을 열었다.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 입구에 들어선 모습. 안쪽에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 입구에 들어선 모습. 안쪽에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요행)

당시 제주는 독립출판물이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다. 독립출판물이라는 단어도 생소하던. 그런데 그때부터 이곳은 서가의 약 70%를 독립출판물로 채웠다. 장효정 책방지기는 독립출판물에서 자신과 비슷한 결을 발견했다. 

‘자신만의 목소리, 자기만의 방식으로 알리기 위해 탄생한 책들. 많은 곳에 닿을 수 없다 해도 분명 누군가는 공감해 주리라는 믿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세상에 나온(발췌 : 나이롱책방 블로그)’           

삶의 주도권을 단단히 쥐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하는 것. 자신의 중심을 확실히 세우는 것. 장효정 책방지기가 독립출판물에 끌린 이유다. 책방의 모든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책의 내용이 일치해서 가져다 놓은 것 또한 아니다. 다만, 독립출판물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세상에 알리고 독자와 제작자, 창작자를 연결해 주고 싶었다. 대형출판사에 비교하지 못할 만큼 홍보가 어려운 독립출판물 상황을 알기에 조금이나마 홍보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이 책방지기의 의지는 제주에 독립출판물 시장을 성장시키는 발판이 됐다. 나이롱 책방이 문을 열기 몇해 전 라이킷 책방이 제주에 문을 열었는데 이곳 역시 독립출판물을 많이 다뤘다. 이 두 곳은 전무했던 제주 독립출판물 시장을 형성하면서 도내 독자들의 시야를 넓혔다. 독자들이었던 이들이 책방을 열면서 독립출판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주는 독립출판물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책방이 많은 곳으로 입소문이 났고 많은 이들이 책방 투어에 나서고 있다.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 내부를 환히 비춰주는 창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이도일동 소재 나이롱 책방. 내부를 환히 비춰주는 창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요행)

이 책방의 이름인 나이롱. 어떤 의미일까? 나이롱 환자, 나이롱 신도할 때 그 나이롱이 맞단다. 출판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다가 책방을 운영하는 스스로를 나이롱 책방지기라고 생각하며 붙였다고. 나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한자를 조합하니 ‘어떤 나(那), 이로운 이(利), 농담 롱(弄)'이 돼 ‘어떤 이로운 농담’이란 근사한 뜻을 갖췄다. 

어떤 이로운 농담. 삶을 이로운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왠지 마음이 가벼울 것 같다. 매사 온 신경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은 버겁다. 일부러 여유를 만들어 가급적 힘을 빼고 이로운 농담을 즐기며 살이야 할테다. 그러니 나머지 시간은 최대한 힘을 빼고 이로운 농담을 즐기며 살아야 할테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만의 이로운 농담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일이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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