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사진=요행)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사진=요행)

인터넷 검색창에 ‘호시노 도미히로’를 써넣었다. ‘구필화가’라는 말이 따라왔다. 1970년 중학교 체육교사 재직시절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다가 장애를 입었다고 한다. 사고 2년 뒤 호시노 도미히로는 입에 붓을 물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첫 전시회를 열었고 후유장애예술가로 활동하며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덕분에 인터넷상에서 그의 시 몇 편을 만나볼 수 있었다. 

오늘도 한 가지 슬픈 일이 있었다.

오늘도 또 한 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망했다가 포기했다가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평범한 일들이 있었다.

- 일일초 / 호시노 도미히로 

큰 사고를 겪으면 대부분 좌절하고 깊은 절망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도미히로는 그 슬픔에 빠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다. 그의 시가 더욱 힘있는 이유다.

이번에 소개할 책방은 도미히로의 시가 책방 이름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냈던 시인처럼 책방지기도 그런 사람이다. 세상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들로 좌절을 겪고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함께라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에서 선한 영향을, 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이 책방지기가 선택한 책방의 이름은 ‘어떤 바람’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불면 녹색 바람이 되고 

꽃에 불면 꽃바람이 된다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됐을까 

- 어떤 바람 / 호시노 도미히로

처음 책방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바람’이란 단어를 ‘소망’으로 받아들였다. 이 책방에 가면 내가 꿈꾸던 소망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생각지 못했던 소망을 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의 ‘바람’은 자연현상을 이야기할 때의 그 바람(Wind)이였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내부에 호시노 도미히로의 시 '어떤 바람'의 캘리그래피가 전시돼 있다. (사진=요행)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내부에 호시노 도미히로의 시 '어떤 바람'의 캘리그래피가 전시돼 있다. (사진=요행)

시 ‘어떤 바람’이 나에게는 사람과의 관계로 다가왔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어떤 바람’인 것이다. 향긋한 녹색 바람을 전하는 사람이 있고,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악취를 실어 오는 바람을 전하는 이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향긋하면서도 시원하지만 포근한 바람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왔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환기시키고 내가 소중한 만큼 남을 존중해야 함을 이 책방은 이름에 의미를 담아 전하고 있다. 서가에 진열된 책들을 보면 ‘존재’에 대한 책방지기의 깊은 성찰과 존중감이 보인다. 인권 특히 소수여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와 동물권, 환경권에 대한 책이 주를 이룬다.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로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타인과의 조화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들로 구성돼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길가의 이름 모를 풀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성장해야 한다고.

어떤 바람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다. 산방산과 바다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과거 이곳은 동네 슈퍼마켓이었다고 한다. 옛 슈퍼는 보통 가게 내부에 문이 하나 더 있는 구조가 많다. 집이자 가게인 것이다. 이곳도 그렇다. 이곳은 문 하나로 가게와 집의 경계를 나눈 것에 더 나아가 높게 단을 만들어 1층, 2층으로 구분지었다. 1층은 슈퍼마켓이고 2층은 집인 구조였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은 1~2층으로 구성돼 있다. (사진=요행)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은 1~2층으로 구성돼 있다. (사진=요행)

이런 독특한 구조 덕에 공간이 더 특별하다. 1층은 책과 소품이 진열돼 판매된다. 카운터 역시 1층에 있다. 2층은 중앙에 큰 테이블이 있어 책을 읽거나 모임을 즐길 수 있다. 2층 벽면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사진, 시화전, 도서원화전 등의 기획전이 잇따라 마련되고 있다. 

2층 한 켠에는 피아노가 있다. 손님들 가운데 이곳에서 연주를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책방지기들은 책방이 이곳을 찾는 이들이 공간을 만들고 꾸려진다고 종종 말한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들 덕분에 시골동네의 작은 책방이 일순간 연주회장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2층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통유리창이다. 통유리창엔 안락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책방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편하게 지내다 갈 수 있게 배려한 책방지기의 마음이 전해진다. 

1층에도 도로에 난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책방 곳곳엔 판매하지 않는 중고서적도 있다. 중고서적 중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 들어 사색에 잠기기 좋다. 중고서적의 절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만화책도 가득하니 가족 단위로 찾아도 좋을 공간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독립출판물과 그림책이 카운터에 진열돼 있다.  (사진=요행)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독립출판물과 그림책이 카운터에 진열돼 있다.  (사진=요행)

이곳의 책방지기는 김세희, 이용관씨 부부다. 이용관씨는 책방의 일부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책방의 거의 모든 운영은 김세희씨가 맡고 있다. 내가 찾아간 날은 김세희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권에서 생활하던 부부는 2017년 제주로 이주했다. 아내는 책방 운영을, 남편은 귀농을 하기로 결심하고 사계리에 정착했다. 제주는 가족 여행으로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차를 타고 돌아다녀서 사실 마을 구석구석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일하랴, 육아와 살림을 하랴 서로를 돌아볼 새 없이 바쁘게 살아온 부부에게 세희씨 어머니가 1박 2일만이라도 둘만의 여행을 떠나라며 시간을 내어주셨다. 둘은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그때 걸었던 곳은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사계리를 거쳐 대정읍 모슬포항으로 향하는 코스인 제주올레길 10코스다. 이때의 추억이 특히 용관씨에게 크게 각인됐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내부 2층. 큰 창에 기대어 책을 읽을 수 있다. (사진=요행)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책방 '어떤 바람' 내부 2층. 큰 창에 기대어 책을 읽을 수 있다. (사진=요행)

어디서나 고른 수평선, 검은 돌담 안에 생기 가득 자라난 채소들, 든든하게 앉아 있는 산방산, 그리고 마음에 품고 있는 해묵은 고민과 번뇌들을 날려 보내는 것 같은 시원한 바람.

이곳이라면 자신의 시간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살이에 맞춰야 하는 시간이 아닌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연고도 없는 제주로 그렇게 이주를 결심했다. 

용관씨는 귀농을 계획했다. 하지만, 세희씨는 제주에 와서 무엇을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러다 10년 전 제주에서 한달살이를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당시 제주는 책을 사려면 시내 서점에 나가야 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나 참고서 등이 주를 이루어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접하기가 어려웠다. 책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인 것이 제주 생활의 유일한 흠이었다. 그래서 제주 이주를 결심한 마당에 책방을 운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단다. 

책을 좋아하는 세희씨는 책이 있는 공간에서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어 했다. 하지만 책방 문을 열고 2~3년은 책방지기로써의 정체성을 확립하느라 고군분투했다고 했다. 이제 어느덧 5년 차인 지금,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세희씨는 보다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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